영등포 문래동에서 (17회)

이제 그 지긋지긋했던 피난생활도 끝이 난 것 같다. 마치 모세가 자기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해 이스라엘로 가던 출애굽기 성서의 말씀이 생각난다.

1.4후퇴 때 신천을 탈출하여 그 많은 피난민 대열에 끼어 필사적으로 해주까지 와서 어머니와 또 이별을 하고 동생과는 만나게 되었던 일이며, 창린도에서 가족들이 발진티푸스로 죽을 뻔했던 것이며, 용호도에서 뜻하지 않았던 보도대장 직으로 생활했던 일이며 용호도를 탈출하여 연평도까지 오는 동안 바다 귀신이 될 뻔했던 것이며,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해서 이곳 영등포까지 오는 동안 1년 남짓한 동안 그야말로 구사일생의 고비를 넘겼으나 아직 남은 고개가 또 있었다.

서울한강 이북을 못 들어가고 이곳 문래동에서 머물게 된 것은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땅에 못 들어가던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주마등같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런데 이곳 영등포까지는 왔지만 역시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누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이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참으로 막연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오늘 일은 오늘에 족하고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만 믿고 또 살아나갈 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그때 내게 딸린 가족은 나와 처 아이들 넷, 그 중에서도 용호도에서 얻은 백일이 조금 지난 희문이 양육이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동생과 또 용호도 보도대에서 같이 데리고 있던 김양백 군도 갈 곳이 없으니 당분간은 기거를 같이 해야 했다. 이렇게 8식구나 되는 대식구를 부양하는 나의 책임은 우선 하루하루가 염려되어 먹고살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장사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피난 중에 얻은 희문이를 제외한 두 딸과 큰 아들 희광 / 필자가 한국전쟁 이전 월남할 때 가지고 나왔던 사진이다.

신천을 떠날 때 아내가 가지고 나온 비단 보따리, 그때는 고생보따리였지만 그 후 피난시절에는 오직 우리를 먹여 살리던 효자보따리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보따리에 있는 비단으로 그동안 식량을 바꾸어 머기도 했고 또 팔아서 급한 용돈도 써왔던 것이다.

그렇게 하고도 아직 조금 남아 있어서 그것을 시장에 들고 나가 팔아 보았으나 팔리는 것이 신통치 않았다. 하루 일당 벌이도 잘 되지를 않아 그 당시 제일 흔하고 잘 팔리는 미군 군복 염색한 것을 지방에 가지고 가서 팔기도 했다. 정착 초기에는 얼마동안 이런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때의 식생활은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문래동에 적산가옥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 하나를 권리금을 주고 입주해 있어서 우선 거주문제는 그런대로 해결되었지만 식생활은 보리밥이 주식이었고 점심에는 그 보리밥도 못 먹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는 어느 날 옆집에 사는 최원범(지금은 오페라 테너 가수)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왔다가 우리가 피난 올 때 가지고 온 재봉틀을 보고서 하는 말이 “이거 참 좋은 미제 싱거 재봉틀인데 우리 이것으로 모시 적삼을 만들어 팔며 반찬값이라도 벌 수 있다”고 하여 아내는 둘이서 그때가 여름이니까 우선 모시 적삼을 만들어 팔아 남은 돈으로 두 집의 반찬값을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낙양학교에 교사로 취직을 하면서부터는 차츰 생활이 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학교에서 모든 선생님들에게 보리쌀 1가마씩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면 그 이야기를 하며 기억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북에서 나온 피난민들에게 가호적 제도를 신설하여 호적 신고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호적신고를 그때 거주하고 있던 주소지 즉 서울特別市(특별시) 永登浦區(영등포구) 文來洞(문래동) 467番地(번지)로 하였던 것이 나의 본적지가 된 것이다.

도림동 교회에서

서울 영등포에 정착하고 처음 등록한 교회가 도림동 교회였다. 학생시절에 원효로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해본 경험은 있으나 피난을 갔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성가대를 지휘하게 된 교회가 바로 도림동 교회다. 또 서리집사 직을 처음 받은 교회도 도림동 교회다. 그리고 피난살이에서 돌아와서 처음으로 음악회를 발표하고 찬송 독창회를 개최한 교회 역시 도림동 교회다.

이렇게 볼 때 도림동 교회는 비록 3년(1952-1954)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적을 두었던 교회였지만 나의 신앙 기반을 자리 잡아 준 교회라고 하겠다. 당시의 담임 목사는 유병관 목사였는데 유목사가 돌아가신 후 그 후임으로 유 목사님의 아들인 유의응 목사님이 대를 이어 목회를 하고 계신다.

지난 1997년 10월 10일 발간한 도림동교회 70년사를 보면 거기에는 영광스럽게도 나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적어 본다.

(전략) 1953년 12월 21일 공동의회에서는 6.25사변 후 처음으로 서리집사 선출을 위한 투표가 실시되었다. 남녀 서리집사는 당회에서 공천한 후보 가운데에서 당회에서 정한 숫자대로 공동의회에서 투표하여 표를 많이 받은 순서대로 선출했다. 1953년 공동의회에서 투표로 선출된 1954년도 서리집사 명단은 득표의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남자집사: 김용환, 박기선, 조흥선, 강상복, 홍준모, 전요근, 김영규, 조상일, 조영태, 김훈환, 홍성태 (12명)

여자집사: (16)명 생략

▶성가대

(전략) 1953년 7월 27일에는 강상복이 성가대장에 임명되었다. 강상복은 1954년까지 성가대장으로 지휘를 담당했다. 1951년말 풍금을 구입한 이후 주일예배와 성가대의 반주는 안기남이 담당했다.

이때에 영등포, 양평동, 도림동 세 교회 성가대가 주동이 된 연합성가단 필그림 합창단이 있었는데 도림동교회의 강상복이 지휘를 했다. 또 도림동교회의 안기순, 이정숙, 김상도가 주멤버로 활약했다. 필그림 합창단은 각 교회로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했고 기독교방송국에 출연도 했다.

(강상복은 1988년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현재 그 교회 공로장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