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댄스와 쭈쭈함대 (11화)

사람들과의 만남을 돌아보면 모두가 나에게 좋은 경험이었다. 그것이 다 인연을 맺는 주춧돌이었다.

나는 인턴으로 있던 중에 새로 부임된 미 해군 자문관 브로 존슨(Broar A Johonson) 중령의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병원장이던 백기호(백내과, 평안도 정주 출신) 중령은 호인이었으나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나는 부산에서 경험한 1년을 바탕으로 이 두 사람 사이의 통역을 맡았고, 자문관실에 자그마한 책상과 의자도 배정받았다.

얼마 안 가서 나는 백 원장의 도움으로 해군장교 관사에 단칸방을 얻을 수 있었다. 여좌동에 있는 관사였다. 그래서 진주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진해 해군 기지는 주로 우리 해군이 이용했고, 외국 군함은 어쩌다가 한번 입항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진해 해군장교구락부에서는 외국군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하루는 덴마크 병원선과 미 군함이 함께 입항했다. 그날 밤 해군장교 구락부 파티에는 진해 해군통제부에 근무하는 영관급 이상 장교들이 모두 초대되었다. 백 중령과 존슨 중령은 물론 나도 함께 참석했다.

그곳에서는 미군장교들과 간호장교들 간의 사교춤이 한창이었다. 장교구락부 소속 한국인 댄서로 여럿 있었다. 나와 동행한 두 중령은 둘 다 춤을 출지 몰랐다.

파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 내게 춤을 춰보라고 권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었다. 두세 곡을 추었을까, 자리로 돌아오니 병원장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춤을 멋지게 잘 추는 구만. 어디서 춤을 배웠나?”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며칠 후 병원장이 나를 불렀다.
“민 중위, 우리들 몇 사람한테 춤을 가르쳐줄 수 있겠나?”

그날부터 근무를 마친 뒤 밤마다 춤 교습을 했다. 춤 교습 상대는 백 병원장 내외와 신경외과 서용원 내외, 정형외과 이승택 내외 여섯 명이었다. 남자들을 가르칠 때는 내가 여자스텝을 밟고 여자들을 가르칠 때는 내가 남자의 스텝을 밟아가면서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교대로 저녁 식사를 대접받다보니 매일 저녁 집에서보다 풍성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 한국전쟁 당시 진해 해군기지 내의 풍경 (1951.)

1952년 12월에는 해병대로 두 달 간 파견근무를 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서울을 떠나 문산을 거쳐 최전방 해병대대로 가는데, 인민군과 대치하는 곳이 가까워지자 운전병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껐다.

“왜?”
“여기서부터는 적에게 노출될 수 있으니 불을 꺼야 합니다.”

칠흑같은 밤이었는데 용케 대대본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본부 근부장교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고, 5미터 내지 10미터 거리마다 각자 개인 벙커가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당직병이 나의 벙커를 안내해주었다. 벙커라고 해봐야 한 평 정도의 토굴일 뿐이었는데, 모든 벙커의 출입문이 남쪽을 향해 열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짐을 풀고 당직병을 따라 대대장의 벙커에 들렀다. 그 벙커는 훨씬 넓었고 비품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마침 대대장은 작전장교 두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경례를 부치며 신고하려니까 대대장이 손을 내저었다.

“알고 있어. 민 중위!”
대대장은 맥주컵에 양주를 가득히 채웠다.
“선 김에 술 한 잔 마시고 앉아.”

술잔을 접시에 올려 놓더니 단번에 마시자고 했다. 술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거칠게 마셔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의 명령인데 우물쭈물한단 말인가. 명령대로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우리는 전부 권총을 차고 술을 마셨다.

“술을 잘하는 구먼.”

첫 만남에서부터 나는 상관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밤늦게 해산하고 나서야 비로소 야전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죽을 지경이었다. 때마침 당직병이 가져온 더운물로 양치와 세수를 했다. 해장국이라면서 내온 밥과 배춧국도 맛있게 먹었다.

그 당시 김성은 대령이 이끄는 1개 여단이 우리 해병대의 전부였는데, 이들은 미해병 제1사단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아직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국지전으로 한정되어 있어 조그만 고지를 놓고 우리가 점령했다가 인민군이 탈환하고, 곧이어 우리 해병대가 재탈환 하는 힘겨루기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소규모의 전투였지만 항상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무런 장비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응급조치뿐이었으니 군의관의 주 임무는 그저 부상자를 후송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턴 근무를 하다가 왔으니 미 사단 의무대대로 가서 한 달만 견습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찌나 고마웠던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미군 해병사단의 의무대대로 갔다. 그곳에는 장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20명의 군의관에다 간호장교까지 근무하고 있었다. 의무대대장은 병리학을 전공하는 에이스(Aires) 해군대령이었다.

이때쯤 되어서는 나도 제법 영어로 말할 줄을 알았다. 에이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너 영어를 잘하는구나?”

말이 통하자 그는 나를 자주 불러내어 일을 시켰다.

한번은 에이스가 내게 서울 안내를 하라고 했다. 서울로 향할 때에는 에이스 대령이 운전했고, 귀대할 때는 내가 운전할 때도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