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제대 후 유학 수속 (13화)
  제2장 전쟁과 의과 대학생

진짜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전쟁 직후에, 그것도 젊은 중위가 예비역으로 예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54년 초였으니,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무슨 수로 해군 중위가 제대를 할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먼저 백기호 중령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걱정마. 정말 좋은 기회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길이 보이는 법이다. 지혜롭게 잘 생각하면서 뚫어봐라. 이것이 네 평생을 좌우할 기회이니 결코 포기하지 마라. 유학 수속을 위해 자리비우는 것까지는 언제든지 눈감아주마.”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여전히 제대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의 사정과 상관없이 서울에서는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줄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근무하던 주한미군 군의관 새미 리(한국인 2세,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소령은 이승만 대통령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제안을 했는데, 요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젊은 의사들의 유학을 장려하도록 유도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의학수준은 사실 형편없습니다. 젊은 의사들에게 기회를 주어 미국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훗날 그들이 귀국했을 때, 그들은 한국의학에 두 배 세 배로 기여할 것이며 크나큰 발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당장 국방부에 지시를 내려 ‘군인신분령’이라는 법을 제정하도록 만들었다. 새미 리의 조언을 그대로 시행하게 된 것이다. 아마 1954년 5, 6월경이었던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로 인해 육군 군의관 중에 예닐곱 명이 이 법의 적용을 받아 미국에 인턴으로 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의 경우, 병원장의 도장은 받았지만 해군본부의 의무감인 박주병 준장으로부터는 단박에 거절당했다.
      
“제대? 안 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군의관이 제대를 하나?”
 
▲ 새미리와 이승만 대통령 [출처 ; 미한사(미주 한인을 위한 사이트)]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유학의 길을 뚫기 위해 진해와 부산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박 준장의 아들이 군인신분으로 육군에서 제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박 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의무감님 아드님은 제대가 되는데 저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는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 있어.”

얼마 후에 박 준장의 승인이 떨어졌다. 그 다음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중장의 승인을 받아야 할 차례였다.

“안 돼! 그러잖아도 군의관이 크게 모자라라는 판인데 제대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당시 서울대학교 약대생이었던 동생 병춘을 만나 상의했다. 내 얘기를 찬찬히 들은 동생은 당시 교제하고 있던 여자친구와 이 문제로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그 여학생의 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녀의 삼촌은 국회의원에다 국방분과위원회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국방부장관과 해군참모총장까지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보건사회부였다. 그러나 보건사회부에서는 뜻밖에도 인턴자격으로는 안 된다는 말을 전해왔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레지던트로 간다면 승인을 해주겠소.”

나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희망을 품고 진해로 내려왔다. 존슨 중령에게 상의를 하자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써주었다. 그쪽 병원에서 나를 레지던트로서 스카우트 한다는 내용을 서면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 초청장을 갖고 나는 서울대 의대 홍창의 교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홍 교수의 소개로 연세대 생리학과 김명선 교수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했다.

“내 제자가 보사부 의전국장이니 내가 동행해서 얘기해 주지. 가자.”

전화 한 통화만 부탁했는데, 김 교수는 한사코 내 손을 잡고 보사부로 향했다. 의전국장은 김 교수를 극진히 모셨다.
 
“똑똑한 사람이 유학을 가겠다는데 왜 만류하는 거야? 유학을 다녀오면 몇 배 더 많은 일을 시키면 되잖는가? 허락해주게.”

“레지던트로 간다면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만.......”

이때다 싶어 나는 얼른 영문초청장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의전국장의 말 한마디로 나는 필요한 서류를 받아냈다. 꼭 3개월만이었다. 그 후 여권과 비자를 받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고 영어시험을 치렀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출국날짜에 맞춰 비행기표도 구입했다.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편도 요금은 당시 돈으로 512달러, 참으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1954년 6월, 해군 중위에서 예비역으로 제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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