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피라미드형으로 치프를 선발한다. 다시 말해, 최초 레지던트 여덟 명을 선발해서 매년 두병씩 탈락시켜 마지막 남은 두 명 중 한명을 치프 레지던트로 뽑는 방식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원통형 방식이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똑같이 과정을 마치게 되어 있다. 참고로 미국의 의대 제도는 8년, 한국은 6년이다.
매년 10월경이 되면 레지던트들의 눈이 뒤집힌다. 병원에 남아 진급하느냐 탈락하느냐의 가림 길이기 때문이다. 과로를 핑계로 적당히 하는 사람은 쫓겨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동료들이 벌써 알아보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우열이 확실하지만, 레지던트 3년차쯤 되면 진짜 실력파들끼리 본원에 남겠다는 의지로 경쟁이 치열하다. 이들은 쫓겨나더라도 모 병원에서 타병원에 소개해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부수적인 이유로 더욱 불안했다. 만약 본원에서 쫓겨나 타병원에 갈 경우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받아주겠는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존경할 만한 교수를 모델로 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밀러 교수였다.
밀러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수술을 하다보면 진행이 막히고 다음 동작을 어디에서부터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는데, 이때 밀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으며, 때로는 수술실 안에서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조수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무결해야 했다. 그래서 마취과 의사나 간호사들은 그와 함께 수술하는 날을 재수 없는 날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도 자신의 수술이 다른 의사에 비해 늦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은 오후 1시에 시작한 수술이 지지부진하여 오후 9시가 되었는데도,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밀러는 조수, 간호사 그리고 마취과 의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곁눈으로 벽시계를 훔쳐보고는 별안간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 다섯 시도 되지 않았구만, 뭘......”
이 말을 듣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취과 의사가 대답했다.
“당신이 수술한다는 걸 저 시계가 아는 모양이군. 벌써 몇 시간 째 잠을 자고 있으니 말이오.”
|
|
| ▲ 터프츠대학 의과대학병원(New England Medical Center) |
|
마취과 의사는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계속 말을 덧붙였다.
“여보시오. 당신에게 왜 시계가 필요하오? 달력이 필요하지. 아직 화요일이니 시간 걱정 말고 이번 주 내로 끝내기나 하시오.”
밀러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마스크 안으로 입술을 깨물면서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내가 모델로 삼은 교수들은 밀러 외에도 또 있다. 캘로(Callow) 교수의 박식함은 아무도 못 따라갔다. 그리고 라인랜더(Rhinlander) 교수는 과단성이 있고 용감했다. 아무리 위급한 환자라도 콧노래를 부르며 시술해나갈 정도로 배장이 두둑했다.
이 세 명의 교수를 벤치마킹하며 수련의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들의 장점을 배우려고 애쓴 나는 운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마음 줄이며 열심히 일한 대가는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레지던트 3년차까지는 쫓겨나지 않고 병원 측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차로 근무할 때 한번은 영국인 펠로우가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한국에 가서 당신의 그 놀라운 수술실력을 발휘할 수나 있겠나? 수술실이나 의료기기 수준이 따라가 주기나 할지 의문이오.
”
대놓고 야비하게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나는 펠로우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다시는 내 조국을 향해 그렇게 말하지 마라!”
배짱있게 나가자, 이후로 그는 절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좀 더 여봐란 듯이 가슴을 펴고 병원에서 근무했다. 야근 중에는 때때로 흑백TV를 통해 야구나 미식축구 중계방송을 보며 취미활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운동경기를 시청하고 있는 동안에는 온갖 시름과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고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떻게든 치프 레지던트까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치프 레지던트는 레지던트의 끝을 장식하는 상징이다. 물론 치프라고 해봤자 연봉은 겨우 1천 달러였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