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 다니면서 나는 바이올린에 심취했다. 본과 1, 2학년 때까지도 옆집에서는 내가 음대생인줄 알 정도였다. 나중에는 악기 속에 솜을 채워서 소리를 죽인 채 바이올린을 켰다. 이웃집에는 밤 10시 이후로 바이올린을 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연습에 몰두했다.
하루는 책가방에 가운을 걸치고 문밖으로 나서는데 옆집 주인이 놀라며 물었다.
“그게 뭐냐?‘
“실습복이예요.”
“음대에서?”
나는 씩 웃었다. 옆집 아저씨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의대생인 줄 알게 되었다.
오전에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주로 실습을 했다. 일단 오후 실습에 들어가면 끝나는 시간까지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실습 담당 교수가 출석체크를 마치고 나감과 동시에 나는 실습실에서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다.
실습을 빼먹고 의대 3층 강당에 가서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해 어두워서 악보가 보이지 않아 더 이상 바이올린을 켤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했다. (그때는 대강당이 전등이 없을 때였다.)
배가 고파 공부를 못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생활고로 먹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서 부쳐온 생활비 절반을 레슨비로 사용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작곡 레슨까지 받았다. 우리가 연주하기 좋게 편곡을 해야 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해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하여 생방송으로 연주도 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메디컬 오케스트라’는 1년에 두 번 정기 연주회를 가졌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그 시절 나는 음악으로 재능을 살리고 싶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공부는 최소한도로 했다. 우리 학년에서 1등은 경기중학교 동기이자 짝궁인 민병석이었다. 시험 때마다 민병석의 시험지를 커닝했기 때문에 시험성적은 좋았다. 한번은 병석이가 90점을 받았고, 나는 95점을 받았다. 그러자 병석이는 나에게 항의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야, 커닝한 티를 안 내려고 바꿔 썼는데 그게 더 좋은 답안이었나보다.”
당시 시험문제는 논술형이었다.
“뭐야?
민병석(가톨릭 의대 교수ㆍ아웅산사건 당시 작고)는 정말이지 공부를 잘 하는 친구였다. 그 외에도 문형노(서울대 의대 교수ㆍ작고), 문효중(부산대 의대 교수ㆍ학장 역임) 민병근(중앙대 부총장ㆍ울산대 학장 역임)이 공부를 잘했다. 이들은 모두 실습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10등 이내에 들었다. 나는 바이올린에 미쳐 있었지만 병석이 덕택에 성적은 좋았다. 이게 다 커닝 덕분이었다.
의과대학 3학년 때 소독(消毒)에 대한 개념이 없어 혼났던 경험이 있다. 본과 3학년에 갓 올라온 우리는 산부인과 수술을 참관하러 수술실에 들어갔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조를 이뤄서 들어갔는데 간호조무사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수술대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그때 수술대 아래로 기구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얼른 그것을 주어서 소독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독하지 않은 손으로 만진 오염된 기구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자마자, 조교수였던 이수종 선생(훗날 수도의과대학 학장)은 눈을 부라리며 불호령으로 나를 수술대에서 내쫒았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내가 쫓겨나자마자 소독한 테이블보 전체를 교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우리가 이비인후과를 돌 무렵 6.25전쟁이 발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