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네 식구는 얼마 전에 쌀을 사왔던 여주 한 씨 집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나는 배낭을 지고, 한약을 지어 넣은 보따리를 짊어졌다. 피난을 가다가 인민군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다. 인민군 하나가 보따리 속의 한약을 꺼내보고는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내가 밭은 기침을 하자 인민군이 눈을 부라리며 쫓았다.
“재수 없다, 가라!”
내가 중병을 앓는 사람인 줄 안 모양이었다.
쌀을 구입하기 위해 개군면에 갔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두 번째 피난길에서는 여기저기 죽을 고비가 숨어 있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동안 일명 ‘쌕쌕이’라고 부르는 제트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나타났다.
쌕쌕이는 망설임도 없이 나룻배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피난민들은 저마다 바닥에 엎드렸지만, 더러는 총에 맞아 죽었다. 배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물이 차올랐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을 퍼다 강에 버리는 일에 사력을 다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일행은 무사했다.
여주를 향해 신작로를 따라가는데 인민군 트럭을 본 비행기가 또 다시 사격을 개시했다. 우리는 얼른 신작로 옆 개천으로 피신해 엎드렸다. 그때 우리와 함께 엎드렸던 피난민 두 명이 바로 옆에서 즉사했다. 전쟁의 잔인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이틀 만에 여주에 도착해서 주인에게 사정을 하자 주인이 아랫방을 내줘 네 식구가 피신할 수 있었다. 한 여름 보릿고개 시절 우리는 밀가루를 섞은 보리죽을 먹으며 지냈다. 보름이 지나자 그것도 모자라 옥수수죽으로 연명했다.
여주도 안심할 곳은 못되었다. 시골에까지 인민군 징집이 실시되는 바람에 아내는 집에서 한약을 달였고, 나는 종일 방에만 누워있었다. 멀쩡한 사람이 꼼짝없이 방에만 누워있으니까 진짜 환자처럼 느껴졌고, 나중에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헛것이 보일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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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발발 직후 남으로 피난을 하는 피난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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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서울수복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다 우리 가족은 퇴각하는 인민군들과 마주쳤다. 미군 비행기가 저공비행을 하자 우리 네 식구는 본능적으로 개천에 엎드렸다. 머리 위로 총알이 빗발쳤다. 좀 더 참지 못하고 집을 나선 것이 후회되었지만 누굴 원망하겠는가.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올라와 명륜동 집에 도착했다.
9월 28일, 서울은 우리가 탈환했지만 그 혼란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었다. 10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나는 가족들과 함께 부산행 기차 화물칸을 얻어 탔다. 기차는 정거장에 멈추면 세월아 네월아 떠날 줄을 몰랐다. 물론 역이란 역은 다 쉬어갔다. 덕분에 삼랑진에서 마산, 진주에 도착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진주집에 와서 부모를 뵈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감격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조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자 마음 한 구석이 허물어질 듯 허전했다. 생전의 조부가 지인들과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던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도무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면서 나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래저래 11월 한 달은 집에서 푹 쉬었다. 심신이 고단하던 차에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휴식이었다.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번에는 집집마다 국군 징집장이 나왔다. 내 나이 만 스물한 살이었다. 영락없이 나는 징집대상자였다.
전세는 1.4후퇴와 함께 중공군이 밀려들어와 서울을 재점령 해버렸고, 국군은 후퇴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불러 앉혔다.
“니는 부산으로 가 피신해 있그래이. 여기 진주에서는 더 이상 숨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군대에 가더라도 군의관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내와 어린 자식, 부모님을 남겨둔 채 홀로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