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의 병원 추가건립에 대한 애착 (52화)
  제7장 서울아산병원장 시절

정 회장의 돌이킬 수 없는 건강 적신호는 경기도 이천 금강컨트리클럽에서 삼복더위에 골프를 치던 중 찾아왔다. 

물 한 컵 안 마신 채 골프를 쳤는데, 정치문제로 현대가 당하는 이야기를 하며 노기를 앞세워 마지막 홀까지 돌다 몸에 이상을 느끼고는 곧바로 청운동 자택으로 갔던 모양이었다. 두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정 회장은 청운동 자택에서 2층으로 올라가려다 갑작스런 다리 마비 증세에 측근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 연락 하지마. 쉬면 낫겠지.”

밤중이었다. 정 회장은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 응급호출을 받고 의료진이 달려갔다. 정 회장의 몸은 탈수증세와 함께 뇌혈관에 문제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의 피는 45%가 고체이고 59%가 액체다. 고체가 많아지면 혈액이 뻑뻑해지면서 이미 동맥경화가 진행되었을 법한 혈관들은 막히고 만다. 그런 증세가 왔을 때 두세 시간 안에 병원에 오면 마비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그 이상 시간이 지체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의료진은 전력으로 치료했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삼복더위 아래에서 땀을 많이 흘리며 골프를 쳤던 탓에 체내의 피가 농축되면서 멍울이 생겨 혈관을 막았고, 그로 인한 뇌손상으로 신체에 이상 증세가 온 것이었다. 

정 회장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전처럼 부인의 병환에 대한 염려도 할 수 없었고, 또 자주 챙기지도 못하는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대선 실패 후 몰려든 정상적인 시련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정 회장이 너무 연로했던 것일까. 나는 정 회장의 판단력이 많이 무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 회장의 외부 활동이 점점 줄어들고 있던 1999년 봄,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별안간 청운동 자택에서 연락이 왔다. 아침 7시에 청운동에 도착해보니 당시 현대종합상사의 이춘림 회장이 미리 와 있었다.

이춘림과 나는 경기중학교 동기동창이다. 서울대학교 건축과 출신인 이 회장은 현대그룹 창립 공신이며 정 회장의 제일 오래된 참모였다. 그만큼 그는 정 회장이 가징 신임하는 임원이었다. 

정 회장은 우리 두 사람을 보더니 다짜고짜 다그쳤다. 
“병원 하나 더 지어라. 둘이 상의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병원을 빨리 지어라.”

우리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있는 것 두개와 똑같이 하나 더 지으란 말이야.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경과보고 하도록 해.”

이 회장과 나는 청운동을 나와 오전 8시쯤 소공동 롯데호텔에 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둘다 막연했다. 그 당시 현대그룹 산하 회사들은 모두 경영상 여유가 없을 때였다. 병원 또한 빚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따로 적립해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원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 정주영 명예회장, 이춘림 회장과

이 소문은 자연스레 계열사들에게 퍼져나갔다. 소문을 전해들은 정 회장의 2세 경영인들은 다들 놀란 목소리로 어떤 사람은 이춘림 회장에게, 어떤 사람은 내게 전화를 걸어서 신신당부를 했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사람은 직접 찾아와서 그 뜻을 전했다. 

“지금 그런 여유가 없으니까, 제발 이 계획을 연기하게 해주세요.”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병원 내 C동 건축추진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회에는 공사가 연기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감춘 채 시제 도면을 속히 완성하라고 재촉했다. 물론 나도 병원 신축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병원 프로젝트 매니저와 건축위원회를 통해 병원설계를 위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C동은 헬리곱터 이착륙장과 명동 맨 꼭대기 중에 정 회장의 저택, 거기에다가 옛날 보스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응급시설을 갖춘 야간병원으로 계획했다. 시간이 없는 샐러리맨 환자들을 밤 12시까지 외래 특과를 통해 진료를 해주고, 한편으로는 야간 병원에 하룻밤 재우며 치료해주는 시스템을 동시에 고려했다. 
 
그리고 헬리곱터에서 즉시 중환자실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설치도 염두에 두었다. 

정 회장에게는 공사가 지연되는 이유를 합리화해야 했는데, 건축에 관해서라면 수백 번 경험을 해본 그였기에 속이기가 쉽지 않았다. 설계를 이유로 핑계를 댈라치면 정 회장은 버럭 역정을 냈다. 

“이봐! 오년 걸려서 설계하면 공사하는 동안 내부 설계를 안 고칠 줄 아나? 대충 지으면서 내부 설계를 하면 돼.”

정 회장은 자꾸만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보고 했다. 
“허가가 빨리 떨어지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정 회장은 대뜸 재단 사무처장과 현대건설 관청 업무에 밝은 중역 한 사람을 부르더니 한바탕 질책을 했다, 
“넌 능력이 모자라니 오늘부로 그만두고 나가. 허가 하나 못 받는 사람이 무슨 자격이 있나? 당장 퇴직금 받고 나가!”

그 사람은 진짜 사표를 내려고 했지만 내가 그 사람의 사표를 가로막았다. 
“그러지 마라. 홧김에 그러신 거야. 좀 참고, 대신 당분간 회장님 앞에 나타나는 것을 삼가도록 해.”

그 중역을 달래면서 나는 바람막이를 해주었다. 

설계도에는 환자 평균재원일수 회전율과 검사시스템 장비를 이유있게 반영하도록 준비시켰다. 주차장도 지하 5개 층까지 늘리도록 했다. 병상은 A동 1천개, B동 1천 2백 개로 잡았다. 

평균재원일수 줄이기를 최대한으로 고려하다보니, 추가할 수 있는 병상은 4백 베드 정도였다. 나는 당일 수술시스템을 많이 활용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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