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의학과 외과학회 (55화)
  제8장 진료실 밖에서

대체의학에 남다른 애정 

병원 사람들은 나름 대체의학의 신봉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양의학 보다 역사가 긴 대체의학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대체의학에도 인간의 몸을 치유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찾아내어 양의학에 접목해보려는 연구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미국의 경우, 국립보건원은 미국 국민들이 매년 대체의학에 사용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은 이런 대체의학이 몸에 해를 주지는 않는지, 만약 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대체의학이, 어떤 경로로, 어떤 상황에서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국민을 위해 검증을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미미했던 이 분야의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려, 연구 희망자가 나오면 거액의 연구비를 배정, 지원해주었다. 치매의 진행을 늦추거나 개선하는 데 이용하는 은행에 대한 연구라든지, 미국 내 20여개 센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침술에 대한 연구가 그 예이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첫째, 대체의학 중에 우리 인체에 해를 미치는 것은 없는지를 가려내는 것이고, 둘째, 만일 이 치료가 유효하다면 어떤 식으로 유효한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어떤 약초가 특정 질병을 가진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면 그 중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해서 신약을 개발한다는 상업적인 목적도 없지 않을 것이다. 

알다시피 중국을 위시한 동양권은 이런 대체의학의 뿌리가 깊다. 우리나라에도 한의학 대학이 여러 군데 있고, 침술을 시행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모든 정밀진단법과 치료법을 갖추고 있는 현대의학은 과연 무엇을 검증해냈는가.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에 매년 한두 번 학생들에게 어떤 풀로 끓인 약을 한 공기씩 먹여서 다음날 대변과 함께 회충을 나오게 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서 회충을 없애주는 구충제가 개발되었다고 들었다. 또한 두드러기가 나면 바가지를 삶아서 머리에다 씌우는 것도 보았다. 

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민간요법을 포함해 대체의학의 무해, 무독성을 검증하고 실제로 어떤 질병이나 불편한 상태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월등한 양의학을 버리고 대체의학을 수용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생각은 양의학에 대체의학을 보완해보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발목이 삔 사람에게는 당연히 발목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깁스를 대게 한다. 그리고 통증 완화를 위해 별도의 약을 얼마간 복용시킨다. 그러나 약을 쓰는 대신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침을 놓고, 깁스를 대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다. 

이처럼 대체의학을 접목시켜 우리가 시술하고 있는 서양의학에 보탬이 되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내 의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희대 한방병원의 침술 전문의를 연구요원으로 연구소에 초빙하기도 했었다. 하버드 대학과 자매 결연을 맺어 2년마다 합동세미나도 가졌는데, 1995년에는 대체의학, 보완의악을 주제로 아산병원과 하버드대학의 합동세미나를 이틀간 개최한 적도 있다. 
 
▲ 하버드 의대와의 협력 의료기관 협약 현판식

1995년 무렵, 제2회 심포지엄 테마는 대체의학이었다. 그때 참석했던 하버드 의과대학장은 ‘대체의학과’를 하버드대학에 신설했다. 아쉽게도 서울아산병원은 아무도 따라주지 않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대체의학의 치료볍을 검증하여 우리가 현재 시술하고 있는 의술에 이용할 것이 있다면 수용할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하다.    

외과학회를 돌아보면 

1950년대에도 외과학회는 있었지만 학술적인 기능은 있으나마나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1960년대 초에 세브란스의대 홍필훈(작고) 선생이 주동이 되어 같은 대학의 이세순(작고) 선생과 서울대 흉부외과 이찬범(작고) 선생, 그리고 나 넷이서 정기적으로 만나 외과학회의 활성화를 놓고 상의했었다. 

회장 제도를 이사장 제도로 바꾸면서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앞으로 내세우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때까지 외과학회를 이끌었던 학회장은 연로했고, 구식 독일교육을 받은 분이었기 때문에 개혁의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네 명은 젊었고, 외과에 거는 기대치를 직접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홍필훈 선생과 이찬범 선생이 교대로 이사장직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학술적인 모임에도 가입하여 학회를 이끌기 시작했다. 

나 자신은 1962년 이후부터 1983년 외과학회 회장을 맡을 때까지 20여년 간 외과학회 임원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그 당시 소수 집단으로서 보잘 것 없었던 학회가 지금은 수천 명의 정회원을 거느린 거대한 단체로 성장했고, 행사도 다양해졌으며, 1년에 두 번 열리는 학술대회의 내용은 이제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되었다. 

지금도 회장과 이사회 제도가 존속하고 있었지만 당초에 있었던 평이사는 평의원으로 개정되었고, 그 당시 상임이사는 아직도 이사로 불리고 있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학술위원장 시절, 지명 발언제도를 도입하여 토론을 유발한 일이다. 강연 내용에 관한 질문을 무기명으로 해도 좋다는 취지로 구두보다는 무기명 질문지를 통해 질의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름이 밝혀지면 곤란해질 수도 있을 까봐 배려를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학문의 토론장이 되어 분위기가 자못 진지했었다. 지금 나는 자문위원으로 있지만 학회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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