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의사, 컴퓨터 의사_2 (57화)
  제8장 진료실 밖에서

옛날 서부활극에 등장하는 작은 마을의 의사는 환자에게 의사인 것은 물론, 인생살이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상담사가 되어준, 마을에서는 존경받는 장로 같은 존재였다. 이런 영화 속 시골의사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상이 아니겠는가!

전문적인 지식의 실제 임상적용에는 예술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환자를 고쳐야지, 질병과 수치와 영상에 집착하여 특정 이상을 환자에게 분리, 치료하려는 경향은 바람직하지 않다. 피검사 수치나 컴퓨터상의 영상, 그림자에만 집착해 똑같은 처방이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면, 왜 의사가 필요하겠는가. 컴퓨터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의학은 과학일지 몰라도 이 과학을 실제로 다양한 환자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임상의술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일어난 생리적, 병리적 현상과 그 과정을 이해하고 검사 수준의 높고 낮음을 가름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각양각색의 성격과 환경을 가진 사람 각자에게 알맞은 처방을 내려 병을 고치고 사람을 고치는 의술은 예술이지 앵무새 같은 과학적 만사 행위가 아니다. 

미국의 의과대학 졸업장에는 ‘의학의 예술과 과학과정(Art and Science of Medicine )을 마쳤기에 졸업장을 준다’라고 적혀있다. 

의학교과서가 먼저 나오고 그 후 사람에게 병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 정반대다. 교과서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천차만별의 현상 중에서 비교적 눈에 잘 띄는 일부를 누군가가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빠진 것도 많고 틀린 것도 있다. 

40여넌 전, 미국에서 인턴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무리 찾아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호흡곤란 환자가 있었다. 이 환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경험 많은 의사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이 이 환자에게 이뇨제를 투약해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환자의 호흡곤란 증세가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사에게 이뇨제를 쓴 근거가 무엇이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Son(자식 같이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애정), 그게 예술인 게야!”

원숙한 판단과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대목인 것이다. 

환자와의 대화도 상대에 따라 달리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어디까지 꼭 알아야 하고, 어디까지 소화할 수 있으며, 감당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설명의 강도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흑백을 가려 주기를 원하는 환자에게는 그에 맞게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을 갖도록 여운을 남길 줄도 알아야 한다. 
 
입장이 곤란할 때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릴 수도 있다. 걱정 어린 눈빛으로 슬쩍 대화를 대신했던 옛날의 대화와 극히 대조적인 요즘의 대화방식은 너무 메마르고 강하다. 검사 수치를 너무 믿다보니 환자와의 대화가 극단적이고 단정적인 용어들로 채워진다. 지나치게 단정적인 말투는 자신감의 표현일수도 있으나 때로는 책임지기 어려운 사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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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대화술에는 넓은 상식을 토대로 한 풍부한 센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환자에게 필요 이상의 공포감을 주면 불안해할 것이고, 반대로 너무 안심시키면 치료에 태만해지기 쉽다. 동일한 질병에 동일한 치료법을 제시할 때도 상대방의 지적수준, 성격, 환경에 따라 다르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먼저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바쁜 시간에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귀찮겠지만, 환자로서는 자기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증상을 호소하는데, 이것을 막거나 듣는 둥 마는 둥 하면 그 의사는 신뢰를 잃게 된다. 

환자는 판사나 검사 앞에서 거짓말을 할 지언정 의사 앞에서는 바른 말만 하는데, 그 진실이 묵살 당하면 반감이 생기는 법이다. 눈 앞에 있는 환자의 전인치료가 중요하지, 수치를 정상화 하는 것이 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요컨대 환자가 의사에 대한 신뢰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진료비에 대한 말썽이 요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병원과 보험당국,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말이다. 현재의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지는 약 30명 정도 되었다. 처음 시작단계에서부터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수가라는 성토가 줄을 이었지만, 초기에는 이런 보험가입 환자가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 극소수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 30년이 지나면서 전 국민에게 건강보험이 실시되는데 비해, 개선되어야 할 보험수가제도는 오히려 더욱 더 나빠져 이제는 의료계의 자존심을 할퀴고 수치심을 갖도록 만들면서 의사와 진료기관의 존폐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료비를 둘러싼 시비가 일어날 수 있음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로부터 이런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마취의사와 병원이 온통 부정투성이인양 오인되게 만들고 있는 언론, 사회, 관(官)의 시각이 환자와 의사 사이에 불신감만 키우고 있다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옛날 의료보험제도가 없었던 시절에는 진료 후에 “선생님, 치료비가 없습니다.”라고 하면, 그냥 돌려보내기도 했고, 때로는 깎아주기도 했으며, 돈 많은 사람은 치료비를 묻지도 않은 채 돌아간 후 봉투를 보내오는 경우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가을에 추수하면 치료비를 갚겠다는 사례도 볼 수 있었고, 고맙다는 표시로 의사에게 푹 삶아 잡수시라며 산 병아리를 가져오기도 하는 인간적인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현대문명이 가져온 최대의 결정물인 컴퓨터가 병원 구석구석을 채우면서, 분명 진단과 진료기술은 진보하고 있지만, 그 뒤편에 가려 서서히 잊히는 청진기 의사와, 그 의사가 환자의 배를 쓸어주면서 전해주던 따뜻함이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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