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뒤의 굳어지는 땅 (49화)
  제7장 서울아산병원장 시절

수세용 탱크 복구작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병원의 화장실을 정상 가동시키기 위해 한 층씩 단계적으로 수세용 탱크를 작동시킨 일이다. 13층 전체의 화장실을 한꺼번에 사용하면 탱크에 무리를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죽었던 병원을 완전히 되살렸다. 우리는 복구 작업을 시작한 지 한주 만에 외래환자를 받았고, 두 주 만에 입원환자를 받았다. 내심 두 달이나 석 달 정도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불과 두주 만에 목구문제를 매듭지었던 것이다. 

그 후 수재 속에 고락을 함께 한 병원직원들은 모두 친구 같았고, 한 배를 탔던 사람으로서의 친밀감은 끝이 없었다. 병원에서 열리는 친목회 등에서 나는 “홍수 났을 때 병원에 있었느냐?”하고 자주 물었고, “예”라고 대답하는 친구에게는 무조건 술 한 잔을 더 권하곤 했다. 동지의식이라고나 할까, 홍수사건은 병원에 커다란 경영손실을 가져다주었지만, 병원직원 전체의 공동체의식을 키워준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모두 다 잃은 것은 아니다.(Not all is lost.)”

나는 이 변화를 굉장히 반가워했다. 의사 그리고 간호사들 간의 불화와 반목도 많이 줄어들었다. 당시에는 몹시 부담스러웠던 문제들이 돌이켜보면 다 병원성장에 필요한 ‘성장통’이었던 것이다.  

장기이식의 완벽한 팀워크

홍수사건을 계기로 직원들의 단합을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모처럼 한마음으로 뭉친 팀워크가 행여 깨지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여전히 의사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독보적인 대가라도 되는 양 으스댔지만, 수련의들과 간호사들 간의 알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조직사회에서 인화단결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나는 병원장으로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단결력도 높이고 더불어 명성도 높일 수 있을 것인지, 고심한 끝에 ‘장기이식’ 계획을 생각해냈다. 자동차공업이 기계공업의 꽃이라면 장기이식은 병원 내 팀워크의 꽃이다. 장기이식을 장려함으로써 의사들 간의 반목도 해소하고 서로 협력하게 만들어 대외적으로 병원의 명성을 높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 폐, 간, 췌장, 골수, 각막, 신장 등등의 이식수술을 위해서는 내과, 외과, 마취과, 병리과, 엑스레이과와 그 외, 장기별로 필요한 과가 보두 합심해서 팀워크를 발휘해야만 한다.

때마침 새로 부원장에 취임한 손광현 선생이 폐에 관심이 많아 손 선생을 <장기이식추진위원장>으로 위촉해서 진행을 맡겼다. 신장이식은 이미 하고 있었지만 폐이식과 간이식, 심장이식은 좀 더 차원 높은 준비가 필요했다. 간 이식은 이승규 선생이, 심장이식은 송명근 선생이 주도했고, 나는 그들에게 전폭적인 자금과 인력을 지원해주었다. 

그때까지 간이식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1년 먼저 수술한 예가 있었지만, 심장이식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폐이식도 시도되지 않았다. 이 팀들은 앞서 시행에 성공한 미국의 병원으로 견학가기를 희망했다. 나는 원하는 대로 보내주었다. 
 
▲ 90년 어느날

미국 견학 후 병원과 연구소에서는 매우 활발한 연구와 이식수술 준비가 진행되었다. 뇌사자의 간이식은 이승규 교수에 의해 1992년 8월 21일에 성공적으로 시술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두 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 후에도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는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뇌자자의 간 기증이 드물어 좀처럼 수요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생체 간이식(살아있는 제공자의 간 일부를 떼어 필요한 환자에게 이식해주는 방법)을 시행하게 된다. 경험이 쌓일수록 수술시간은 단축되었고, 성적도 좋아졌다. 2006년 7월 기준으로 현재 총 1,300명에게 이식수술을 하게 되었고, 91%의 1년 생존률, 85%의 5년 생존률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간이식 성공률에 속할 정도로 발전해왔다. 

한편 심장이식은 송명근 선생의 책임아래 1992년 11월에 처음 시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적인 수술 때문에 언론계가 발칵 뒤집혀, 그 당시 병원은 취재기자들로 북적거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인간의 몸에서 뛰고 있는 뇌사환자의 심장을 다른 환자에게 이식하는 것은 법률상 살인으로 간주될 때였다. 집도의인 송명근 선생이 끝내 검찰에 불려들어간 상황에서, 나는 언론을 설득하여 검찰의 처벌의지를 거두게 하는데 주력했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췌장, 골수, 폐, 각막 등 장기별 이식수술 팀의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약속한 대로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심장이식은 170여 차례 이상을 시행했고, 수술 후 생존률은 전 세계에서 제일 높다. 

여기서 이승규 선생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이승규 선생은 1978년 서울대 의대에서 레지던트를 마친 뒤, 신영병원에서 나와 함께 외과의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고대 구로병원과 본 아산병원은 물론 현재까지 거의 30여년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우직하고 고집도 세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러한 업적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1,200병상 규모의 동관 개원

가을 수해로 타격이 컸던 그해 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병원은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병실이 부족하다보니 들어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 회장이 내게 말했다, 

“병원 하나 더 지어야지!”

내부적으로 설계를 하고 준비위원회를 가동시켰지만 대외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드디어 1992년 12월에 새 건물 기공식을 했고, 1994년 10월에 1,200병상 규모의 동관을 개원했다. 개원식을 마치고 나오는 자리에서 정 회장이 불쑥 물었다. 

“수지를 맞출 수 있겠어?”
“맞춰야죠.”
“얼마나 걸리겠어?”
“일 년 반이면 됩니다.”

신설 동관을 건립한 후, 정말 1년 반 만에 병원은 흑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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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편의시설의 개선 (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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