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문단에 첫 인사하고 (31회)
  제5장 문단(文壇)주변의 이야기들

니시가와 다카오 교수도 일본인으로서는 드러내놓고 발표하기 어려운 주제를 가져와서 흥미를 끌었고, 이죽내 교수의 발표도 상당한 질의와 토론을 통해서 공동연구의, 필요성을 재확인 하는 변화의 물꼬를 터주었다. 

비석과 고분의 답사는 월성군 양남면에 신라시대의 비석이 있다는 이정회 회원의 제보로 회원인 <매일신문사> 이기창 사회부장, 문경현 교수, 나, 이정회 교수 등이 양남면과 대왕바위를 답사하고 기림사에 가서 일박하였다. 

기림사가 보관하고 있는 옛 서적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가치의 유무를 토의한 후 계명대학교 도서관과 관계를 맺어주는 등 오늘날 학자들이 하는 일을 34년 전에 우리 학회가 시도한 것이다. 그윽한 풍경소리가 들리는 기림사에서 긴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 하던 낭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학문업적 재검토 작업은 이정희 교수가 경북대 박영규 교수의 저서를 분석하여 역사의 오류와 논리적 모순을 지적한 글을 <매일신문>에 발표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논문은 대구학계의 화제가 되었고 또 문경현 교수가 효성여대 박은용 교수의 <신라 복식에 대한 연구>를 신랄하게 반박한 글이 <매일신문>에 실리자 여기에 반발한 박은용 교수의 재반박으로 논쟁이 이어졌다. 이 논쟁으로 대구학계는 노장과 소장이, 개혁과 보수의 대결분위기로 이어졌다. 

이 사태 이후 <영남학회>에 위험을 느낀 노장교수들이 젊은 교수들을 학회에 탈퇴하도록 종용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영남학회>는 한때 대구에서 학계와 문화계에 세찬 바람을 일으켰다. 개혁의 바람은 한번은 불어야 했던 바람이고 지금도 그때의 회원들이 만나면 보람 있었던 추억담으로 화제를 삼는다. 

나는 1971년에 <국어국문학회>에 입회하여 몇 차례 논문발표를 하였고, 1979년에는 <한국비교문학회>와 <한국문학연구회>에 가입하여 주제발표와 논문발표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76년 9월에 명지대학교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하면서 다음해부터 명지대학교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문덕수 선생과의 인연

신춘문예 당선 이전에도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등에 수필과 시를 이따금 발표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한 것은 신춘문예 당선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춘문예 당선 후 두 달 쯤 지난 어느 날 <매일신문>에 ‘대구 문화의 문제점’을 칼럼 형식으로 발표했더니, 대구문인협회와 예총 지부장 선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문인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왔다. 나는 그러한 항의를 받고서 논리보다는 감정이, 작품보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더 앞서가는 것이 지방문단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현대문학지(1975년 10월호) / [현대문학 제공]       
당시는 문학잡지가 <현대문학>, <문학사상>, <창작과 비평>, <한국문학>, 시 전문지 <시문학>, <현대시학>, 종합잡지 <사상계> 등이 있어서 지방의 문인들이 중앙의 신문이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할 기회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이 들었다.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대다수의 지방문인들은 중앙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문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춘문예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잡지에 추천을 받아서 등단하는 것을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지역문인들의 불리한 여건이 지역문인들에게 서울에 가서 문단활동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한 것이다. 

나도 가능하면 서울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다른 여건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문단활동의 폭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1975년 3월 명지여고 교사발령을 받으면서 2년 동안 고3 담임을 맡아 학생들의 교육에 전념했으나 한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1975년 12월 말경 장윤우 교수와 함께 <시문학사>를 방문했다. 

그 당시 성신여사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인이요, 화가인 장윤우 교수는 서울의 문단과 화단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예술인이었다. 

나는 월간 시전문지 <시문학> 사무실에서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시문학사>의 주간 문덕수 선생과 처음으로 인사했다. 그때 문덕수 선생은 약간 차가우면서 일에만 몰두하는 중후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문덕수 선생은 인사를 나눈 후에 “좋은 원고 있으면 가져오세요.” 하고 의례히 하는 몇 마디를 말씀하시고서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글을 쓰고 계셨다. 장윤우 교수와 나는 <시문학사>에서 가까운 서대문경찰서 부근의 가서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다음해 1월 중순 ‘소월의 시에 나타난 한(한)의 심리’라는 제목의 평론을 <시문학사>에 가지고 가서 문덕수 선생에게 전달했다. 

이 평론은 1976년 <시문학> 3월호에 게재되었는데, 나의 글이 중앙무대의 잡지에 실린  것은 1972년 3월 <현대시학>에 나온 ‘자의식 문학과 난해의 한계성’ 이후 두 번째였다. 

이 평론은 한주일 후 <주간조선>에 한 페이지 정도의 지면에 내용이 요약되어 소개되고, 최근에 발표된 평론 중에서 가장 우수한 문제작으로 평가된다는 논평도 함께 실렸다. <주간조선>을 본 문덕수 선생은 매우 기뻐하면서 좋은 글이라고 나를 치켜세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문덕수 선생은 당시 문덕수 4인방으로 불리웠던 평론가 김상일, 장백일, 시인 권일송, 신세훈을 비롯한 상당수 문인들을 인사시켜주었고, 그해 <시문학> 7월호부터 3개월간 이달의 시월평을 맡겨주었다, 이때부터 문덕수 선생과 나와의 끈끈한 관계가 3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영남학회> (30회)
  문덕수 선생과의 교유와 중앙문예동인회 (32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