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범학교 진학 (7회)
  제1장 학창시절과 칡넝쿨

3학년에 들어서면서 우리 집은 황남초등학교 앞 미나리밭 근방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우리 집을 지나쳐서 학교에 등하교를 하는 서영수와 박인보는 매일 우리 집으로 놀러왔고, 박인보와 나는 서영수 집 토마토밭 원두막으로 가서 토마토를 신물이 날 정도로 따먹었다.

이 무렵 서영수는 열심히 시 공부를 하면서 시 창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박인보와 나는 서영수의 시 낭독을 듣고 즐기면서 우리들도 시를 읽고 외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시를 외우며 토마토를 따먹는 낭만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이 시기에 이웃 놋점 동네에 살고 있는 주석만이도 때때로 우리들과 합세했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다음해인 1954년 10월 <신라문화제> 시 백일장에서 서영수가 장원을 했다. 그때 장원으로 입상된 시 ‘안압지에서’는 너무 잘 쓴 시로 평가되어 서영수는 이때부터 학생 시단의 스타가 되었다.

박인보와 나는 서영수가 부러워서 장만영의 ‘한국현대시 감상’ 김용호의 ‘시문학 입문’ 등과 여러 시인들의 시를 읽고, 시 창작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 창작은 생각보다 힘들어서 때때로 서영수의 원두막에서 서영수로부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시 창작을 시작하게 된 것은 서영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드디어 입학시기가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고 입학시험은 2월에 있었다. 대구상고 야간부에 진학한다는 나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구사범학교에 원서를 낸다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대구사범학교가 어떤 학교인지도 몰랐고, 주간학교이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대구사범학교는 공납금도 거의 없는 편이고, 군대에도 가지 않으며, 국비를 받으므로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하는 학교라고 말했다. 또 졸업하면 곧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기 때문에 취직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당시는 취직한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고, 초등학교 교사는 좋은 직종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구미가 동했다. 그보다 더 나를 유혹한 것은 대구사범학교는 특차 학교라서 합격이나 불합격을 해도 준특차(準特次)인 사대부고, 전기 고등학교인 경북고, 개성고, 후기 고등학교인 대륜고, 대구상고 야간부 등의 학교에 몇 차례 시험을 칠 수 있다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구의 경북도청에 취직해 있는 작은누나에게 연락해서 대구사범학교 입학원서를 사서 보내달라고 했더니 며칠 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원서에 해당사항을 기입해서 담임선생께 도장을 받으러 갔다. 그때 최을상 선생이 2학기 등록금이 아직 미납되어 있어서 학교 당국에서 직인을 찍어줄지 고민이 되는데, 교감선생과 의논해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이원행 교감 선생은 학생들의 사정을 매우 잘 이해하는 분이셨다.
 
▲ 어느날 서영수, 박인보와 함께 (원두막의 추억)

교감까지는 말씀이 잘 되어 승낙을 받았으나 서무과장이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그러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이상희 서무과장께 연락을 해서 이번 한번만은 직인을 주기로 했으니 시험을 칠 준비를 철저히 하라고 하셨다.

2월 하순경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탔다. 당시의 열차는 화물차를 개조하여 만든 초라한 객차이고, 경주서 대구까지 3시간 이상이 걸렸다. 기차안에는 대구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경주중학교 학생 30여명을 비롯해서 무산중학교, 외동중학교, 인강중학교, 김포중학교 등 학생 60여명이 제 각각 자신감을 가지고 입학시험에 나올 예상문제집을 읽고 있었다.

기차의 내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변종화였다. 대구에 내릴 때쯤 해서 나는 변종화에게 물어보았다. 대구에 투숙할 친척집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변종화는 “삼촌 집은 있으나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이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숙모 집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그를 이끌었다.

삼촌이 사망한 숙모집은 수성교 근방 자그마한 판잣집 방 한 컨에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남의 사정을 전혀 개의치 않은 염치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모르는 어린 소견들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모님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사촌 형제들도 모두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변종화와 나는 숙모님 집에서 3일 동안 수고료 한푼 주지 않고 숙박을 하면서 입학시험과 구술시험을 마쳤다.

그때 대구사범학교 입시 비율은 18:1이었다. 남자는 110명 모집 인원에 1,890여 명이 지원했다. 구술시험을 마친 다음날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경주에서 지원한 학생으로는 변종화와 나 둘만이 합격되었다.

대구사범학교의 학교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서영수는 경주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박인보는 경주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대구에서는 작은 누나 집에 거주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사범학교 시절의 후원자는 작은누나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학년 때의 학반은 남여 공학반인 2반에 들어갔다.

그때 만난 친구 중에는 경주중학교에서 대구사범병설중학교로 전학해서 합격한 전재춘과 대구중학교를 졸업한 이종렬이 있었다. 이종렬은 지금까지 대구사범 시절, 청구대학 야간부 시절, 동양콘크리트 회사 시절, 인천대학교 시절, <청구회>, <칠사회(七師會)> 등에서 약 50년간을 애환을 함께 한 친구이다. 그리고 우리반에는 조수권, 윤장구, 김정탁, 이죽내, 김규창, 이영우, 정희수 등 우수한 친구들이 많았다.

1학년 첫 국어시간에 천시권 선생의 <오륙도> 수업을 듣고 역시 고등학교 선생님은 실력의 폭이 넓고, 깊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시권 선생은 3주 정도 우리들을 가르치시다가 경북대학교 교수로 가셔서 총장까지 역임하신 매우 훌륭하신 선생님이셨다.

대구사범학교의 교과과정은 다른 고등학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교과목들이기 때문에 진학을 바라는 학생들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교과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영어와 수학은 일주일에 각각 2시간 정도이고 대신에 초등학교 현장교육에 필요한 국어, 미술, 사회, 음악, 체육, 무용, 교육원리, 교육사, 교육심리, 교육방법, 올갠 실습 등의 과목에 중점을 둔 교육이었다.

수학의 대수학이나 통계 등은 초등학교에 필요치 않다고 해서 아예 배우지 않고, 제2 외국어도 과목에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거나 다른 직장으로 간 사범학교 출신들은 외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도 그 중의 하나이다. 평생을 외국어 공부에 매달려도 일반 고등학교 출신을 따라가기 어려운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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