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펜생활과 새 활로의 모색 (12회)
  제2장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당시 우리들은 어쩌면 다방지킴이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들의 주머니는 거의 비어있었기 때문에 찻값도 없을 때가 많았다. 다방 주인과 종업원들이 우리들의 커피값을 대신 내줄 때도 여러 번 있었다. 막걸리 값이 없을 때는 진로소주회사가 홍보를 위해 매일 밤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여는 노래자랑 행사에 참석했다.

1등은 상금 10만원과 소주 10병, 2등은 상금 5만원과 소주 5병, 3등은 상금 3만원과 소주 3병이었다. 조영윤이 우리들을 대표해서 노래를 불렀고, 부를 때마다 매번 1등을 하여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조영윤은 나에게 그 당시 유행하는 노래 몇 곡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의 음정과 박자는 아우 정확했고, 감정과 기교도 수준이상이었다. 그때 내가 배운 노래는 ‘러브 미 텐더’, ‘체인징 파트너’, ‘나 하나의 사랑’, ‘검은장갑’, ‘케 세라 세라’, ‘서귀포사랑’, ‘닐리리 맘보’ 등이다. 이 노래들은 아직도 나의 18번이나 애창곡이 되었으며 ‘체인징 파트너’는 조영윤과 최형태가 나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노는 생활은 너무 무료하고 지루했다. 작은누나가 영화나 보러가라면서 한 주일에 두세 번 정도 영화입장권을 주었다. 그때 본 영화들은 지금도 마음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자이언트’, ‘에덴의 동쪽’, ‘흑수선’, ‘빅 컨추리’, ‘건힐의 결투’,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등 많은 영화를 보고 감상(感想)과 흥분에 사로잡혔다.
 
선거가 끝난 일주일 후 나는 누나에게 어디든지 발령이 나면 갈테니 초등학교에 발령이 나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때 작은 누나는 경상북도 도청 학무과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도움은 가능한 자리에 있었다. 며칠 후 누나는 나에게 아무래도 고향 근방에 가서 근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월성군에서 좋은 초등학교에 발령이 날 가능성이 있으니 교육청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5월 10일 아버지와 내가 월성군 교육청에 들르니, 교육감이 주는 발령장에는 ‘박달초등학교 근무를 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박달’이라는 이름을 보고 아주 산골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느꼈는지 장학사에게 “애는 못 보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빠른 걸음으로 교육청을 먼저 나가셨다.

그때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주의 시대로, 아버지의 항의는 지금의 교육행정 조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 뒤따라나가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서 그날 저녁 누나에게 경위를 말하니 누나는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하루하루 기다리는 가운데 20여일이 지났다. 나는 다시 지루해져서 시골인 박달에서 수양을 겸해서 짧은 기간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어떤 곳이든 발령지에 가겠다고 말했다. 누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내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 
 
▲ 1950년대 대구시내 풍경 [출처 ; 대구근대역사관]

한편, 대구사범 시절의 <칡넝쿨> 문학동인회를 회고해 본다.

나의 대구사범학교 학창 시기는 <칡넝쿨> 문학동인회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문학에 몰두해 있었다. 사범학교 1학년 말부터 <칡넝쿨>은 나의 문학수업의 토대가 된 글벗회였다.

<칡넝쿨> 문학동인회는 우리들이 갓 고등학교에 들어갈 시기에 원로화가 서동진 선생이 주도한 경북학생예술제의 백일장 행사에서 알게 된 문학도들이 만든 동인 모임이었다.

칡넝쿨은 맨 처음 김원중과 민경중이 발의하여 1955년 초겨울 김원중의 집에서 박곤걸, 김원중, 민경철, 서영수 등이 모여 동인회의 명칭을 붙인 것이 단초가 되었다.

박곤걸(대구사범), 서영수(경주고등), 김원중(오성고등), 민경철(대구상고), 이상홍(대건고등), 김종록(사대부고), 장윤익(대구사범), 정완수(경북고등), 김한규(안동사범), 김미대자(원화여고), 권영주(효성여고), 박우용(김천고등) 등이 시작할 때의 멤버였고, 나중에 조주환(계성고등), 김원자(신명여고), 정영선(신명여고), 박춘화(원화여고), 백정희(남산여고), 이정자(원화여고) 등이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생 신분으로 엄청난 행사를 하였다. 동인지 발간은 물론 미국 공보원과 대구예색장에서 한 ‘문학의 밤’ 행사는 대성황이었다. 사대부고, 효성여고 등에서 한 달에 한번 가졌던 월례발표회는 일간 신문에 매번 보도해주었을 정도로 문학도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처음엔 박훈산 선생을 몇 번 모임에 모시다가 나중에는 박양균 선생을 고정 지도위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또 전상렬 선생은 <칡넝쿨> 창간호에 격려사를 써주었다.
 
동인들 대부분이 시를 썼는데 김한규, 김종록 만이 산문을 썼다. 의성이 고향인 김한규는 교육일선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동문학가이지만 안동사범 재학 중에는 <학원>등에 무게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김종록은 중학생 시절에 쓴 산문이 국어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박곤걸은 문학이 없었다면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꾸준히 시작활동을 하여 <환절기(1977)>, <숨결(1982)> 등 몇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평생 교단을 지키다가 대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문인의 고장 경주 건천이 고향인 박곤걸은 말 한마디 하는데도 너무 신중하여 언제나 우리 동인들의 큰형님 같았다. 우리들을 위해서 지금도 각종 문학서클을 지도해주고 있다.

이상홍은 그 당시 사일동에 있는 유명한 <보생당한의원> 원장의 둘째 아들로서 언제 만나도 유쾌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때로는 괴로울 때도 있는 법이지만 이상홍은 언제 만나도 즐거웠다. 경북대 농대를 졸업하고 농협중앙회 홍보이사로 봉직하다가 타계하였다. 과작(寡作)이지만 무게 있는 시를 쓰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였다.
 
서영수는 경주고등학교 출신으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모교인 경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정년퇴직하였다.

 
  체인징 파트너 (11회)
  <칡넝쿨> 문학 동인회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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