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로 교단에 첫발 (14회)
  제3장 교편생활과 문단

1958년 3월 31일 성주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으나 제4대 국회의원 선거운동 참여관계로 발령취소를 신청한 뒤 두 달 후 내가 다시 받은 초임 발령지는 <박달초등학교>였다.

월성군에서 교통이 편리한 학교로 발령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교육감이 준 사령장에는 ‘박달초등학교 교사에 임함’ 이라고 적혀 있었다. 발령을 받은 20여 일 후 나는 박달초등학교에 부임하러 갔다.

경주에서 언양과 양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삼천리 버스가 오전, 오후 하루에 2번 있었는데 이 버스를 타고 용산에 내려 개천 길을 20여리 쯤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거리였다. 박달이라는 이름 자체가 대단한 골짜기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부임하고 보니 정말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심심산골이었다.

교사는 교장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섯 분이었다. 교장 선생도 담임을 맡고 교사 한 분은 두 반을 담당했다. 나는 처음에는 2학년 담임을 맡아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내가 부임 한 얼마 후 우리학교 근처네 있는 광석초등학교에서 연구공개 수업을 하였는데, “박달초등학교 대표가 되어 연구수업을 강평해달라”는 교장 선생의 지시가 있었다.

그때에 교육청에서는 학무과장과 장학사, 월성군 내의 전 교장, 내남면 내의 모든 학교 고사들이 이 공개수업에 참관했다. 나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연구수업 전체에 대하여 하나하나 강평하였는데, 이것이 그때 참석한 장학사들과 교장선생들 사이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고 손수구 교장선생이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화제가 2학기부터 6학년을 담임하는 계기가 되었고, 10월 하순경에 개최되는 경상북도 교직원체육대회에 안산경기 월성군 대표선수로 참가하는 어처구니 없는 희극을 초래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암산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박달초등학교의 생활은 매우 편안하고 재미가 있었다. 학교 앞에는 개울이 있어서 여름철에는 항상 목욕을 할 수 있고, 저녁이 되면 약간의 음식과 막걸리 파티가 열렸다. 잔치하는 집, 제사지내는 집은 꼭 선생님들을 초청하여 대접하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면 선생님께 가지고 왔다.

이런 흐뭇한 인심에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교장 선생도, “장 선생은 여기 오래 있을 사람 같지 않은 데, 내년 3월까지만 일도 배우고 같이 있읍시다.” 하고 말씀 하시기에, 나는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다.

2학기에 들어와서 6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상당히 키가 큰 학생이 두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학생이 앞의 프롤로그에서 말한 이근우 학생이었다. 당시 이근우의 나이가 16세였으니까 나와는 4살 차이밖에 안 되었다. 또 한 학생도 비슷한 나이였다. 나는 열심히 가르쳤고, 학생들과 호흡도 잘 맞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교육청에서 나를 <안강제일초등학교>로 발령했다. 나는 6학년 학생들과 정이 들어서 이임인사를 하면서 많이 울었고, 학생들도 나를 붙들고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 지금까지 전근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운 곳이 박달초등학교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졸업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 2010년의 안강제일초등학교 전경 

<안강제일초등학교>로 전근하면서 좀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입시준비를 하면서 <청구대학(靑丘大學, 영남대학교 전신) 야간부 국문과에 입학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전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경상북도 도청에 가서 나의 사정을 호소하여 경산군 <숙천초등학교>로 전근을 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학에 등록하지 못하고 다음해에 다시 시험을 쳐서 입학등록을 마쳤다. 그러기 때문에 학번은 2년 늦은 60학번으로 등록되었다. 이때부터 낮에는 교사, 저녁에는 학생이 되는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숙천초등학교는 반야월과 청천 사이에 있는 학교였다. 그때는 경산군에 속했지만 지금은 대구광역시에 속하는 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어서 나는 대구에서 통근을 했다. 주로 기차로 통근을 했으나 기타 시간이 맞지 않으면 버스를 탔다. 숙천초등학교에는 교사가 10명 정도 되었다. 교장, 교감을 제외한 남자 선생 6명과 여선생 2명이 근무했다.

1년이 지난 후 선생들이 여럿 바뀌었다. 대구 근교라 이동이 심해서 남자 선생은 2명이 바뀌었고, 여 선생은 전부 교체되었다. 새로 온 여 선생 중 한 사람은 일 년 후배이고, 한 사람은 이년 후배였다. 두 사람 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성으로 보였다.

새 학기가 된 열흘 후 쯤 학생 하나가 쪽지를 가지고 왔다. 쪽지에는 “나의 퍼스트 인플레이션이 어떻습니까?”라는 글이 씌어져 있었다. 나는 유머 잘 하는 남자 선생이 장난치는 줄 알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때 그 학교에는 장난기가 심한 남자 선생이 한분 있었는데, 그 선생이 나를 골려주는 장난으로 생각했다.

3일 후 직원 조회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가는데 바로 내 옆 교실의 일 년 후배 여선생이 “학생을 통해서 장 선생님께 쪽지를 전하라고 했는데,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나는  당황하여 남자 선생이 장난치는 둘 알았다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을 통해서 인상이 매우 좋다고 하는 쪽지를 전달했다.

그 이후 대구에서 통근하는 두 여 선생과 나는 기차로 함께 출근하고 퇴근 시에도 거의 두 사람과 기차나 버스로 함께 대구로 갔다. 청천역에 내려서 걷는 철길은 높아서 마을에서 훤히 볼 수 있는 길이었다. 남녀선생들이 함께 걷는 모습이 마을사람들의 눈에 거슬렸거나 이상하게 비칠 것으로 예상도 했지만 행동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 년 후배인 P선생은 대구에서 차를 내릴 때 “커피를 한잔 하자”거나 “동촌 유원지에서 보트를 타자”거나 하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나는 다방에서 차를 마신 적은 여러 번 있으나 이성에게 가지는 연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 여 선생에게 관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당시 그 여선생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학교에도 몇 번 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의 나의 여성관은 남여를 불문하고 애인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도덕적 타락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고루한 사고(思考)일지는 모르나 나는 그러한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칡넝쿨> 문학 동인회 (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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