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古都)의 향기_2 (5회)
  제1장 학창시절과 칡넝쿨

김정준은 1951년 1.4후퇴 시 경주에 피난 와서 우리 반에 전학해온 군인 고급장교의 아들이었다. 성격도 활달하고, 당시는 계엄령이 선포된 군인들의 시대라서 건빵을 비롯해서 군대 레이숀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어서 그와 자주 어울려 다녔지만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연락이 없다. 언제든지 한번 만나고 싶은 친구이다.

이상백은 부산에서 전학해온 가깝게 사귄 친구이다. 교과서 이외의 책을 많이 읽는 편이어서 <소년세계>, <소학생>, <새벗>, <소년> 등의 잡지와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 ‘마의태자’, ‘사랑의 동명왕’ 김내성의 소설 ‘진주탑’, ‘청춘극장’, ‘황금굴’, ‘마인’ 방인근의 소설 ‘고향산천’, 그리고 외국소설 ‘소공자’, ‘소공녀’, ‘프란다스의 개’, ‘톰소여의 모험’ 등을 서로 교환해서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책을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은 셈이다. 그때 읽은 책들에서 받은 잠재의식이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이상백은 서울대학교 수의대를 졸업하고, 양평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한점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나와 성적을 다투었지만, 내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수재였다. 경주중학교에 1등으로 입학하였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도 1등으로 입학했다. 내가 대륜고등학교 교사, ECA외국어학원, 대구 대영학원에서 같이 근무하여 늘 친하게 지냈으며, 내가 결혼식 사회까지 한 의기가 통하는 친구였다.

경북대학교에서 실력 있는 교수로 통했고, 특히 강연을 잘해서 대구, 경북지역의 새마을교육은 혼자서 도맡아 할 만큼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수성구와 경주의 국회의원 출마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은 아까운 친구이다.

김하준은 신라 왕손의 후손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예의가 바른 격의 없는 친구로 통했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후 교육부차관급인 중앙국립평가원장과 대한교원공제회 이사장, 여수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베푸는 성격이어서 상관, 동료, 부하직원들에게 두루두루 환영받는 인품을 갖추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친구이다.

박인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매우 친하게 지낸 죽마고우이다. 인보의 집이 우리집이었고, 우리집이 인보의 집이었다. 인보의 부모와 누나들도 나를 친아들 친동생처럼 대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서영수가 합세해서 세 사람의 트라이앵글 우정은 인생의 보람으로 자랐다.

이종석은 정미소를 가진 부잣집 아들로 통했다. 성격이 워낙 깔끔해서 친구들과 대중적으로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몇몇 친구들과는 마음을 터놓는 편이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한통운 전무이사까지 지낸 사회의 모범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친구이다.
 
▲ 초등학교 6학년 때 즐겨 읽었던 새소년 /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창간했다 [출처 ; 이원수문학관]

우리 집이 경주로 이사했을 때는 부잣집으로 통했으나 4학년 이후부터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남한의 어업은 공황에 이를 정도로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은 고용된 어부들과 우리집, 작은집, 삼촌집 식구들을 포함한 40여명의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어렵게 했다.
 
해방 이후 궁핍화 현상과 6.25전쟁은 우리집을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동생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태에까지 갔다.
 
나는 6학년 때 수험비를 낼 수 없어서 중학교를 지망한 학생들이 한두 시간 더하는 수험공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중학교 진학하는 것을 애초부터 포기한 학생들과 함께 공이나 차며 시간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최해철 선생님이 “너에게는 수험비를 받지 않을테니까 수험공부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슴이 벅차서 한참동안 어찌할 줄을 몰랐다.

당시는 전국의 학생들이 일제히 치른 국가고시 점수를 가지고 각 중학교를 선택하도록 하는 입시제도에서, 나는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아 경주중학교 15위이내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경주중학교는 나에게는 “장할 손 신라 천 년, 문화의 터전”이라는 교가의 가사처럼 긍지를 가지는 학생생활을 가지게도 했으나, 입학금과 공납금을 제때에 납부하지 못한 시련으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전쟁 중의 학교 교육의 어려움은 중학교도 초등학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경주중학교 학교 건물과 부지를 ‘제18 육군병원’에 징발당하고 나무판자로 지은 가교사에서 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1학년 A반에 들어갔다. 담임인 최윤상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높은 인품과 실력을 갖춘 분이셨다. 최 선생님 외에도 당시에는 6.25전쟁 중이라 서울에서 피난 온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조광하(趙廣河) 교장선생님은 나중 인하대학교 총장까지 지내신 한국의 석학이시고, 이용근 교장선생님도 대학에 재직하시다가 오신 대단한 석학이었다. 전쟁은 우리들에게 좋은 선생을 만나게 하는 아이러니도 동시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때 우리 반에 들어온 친구들 중에서 한점수, 조성준, 서영수, 이태운 등이 기억에 남는다.조성준은 서울서 피난 와서 경주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으로 다른 과목도 잘했지만 특히 영어를 잘했다.

나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경주 YMCA에서 약 두 달 간 영어공부를 했기 때문에 조성준과 나는 영어과목에 서로지지 않으려고 다투었다. 그때 영어 교사이신 오경환 선생님은 학생들로부터 매우 분명하게 영어를 가르쳐주시는 실력 있는 선생으로서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오경환 선생님도 조성준과 나의 영어를 인정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성준은 2학년이 되자 곧 서울로 전학 가서 소식이 끊어진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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