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징 파트너 (11회)
  제2장 아름다운 삶을 누리자

12월 하순경부터 나는 민주당 국회의원 서동진(徐東辰) 씨의 손자 서정진과 그의 동생 서선아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정일의 아버지 서복섭 씨는 대구체육회 이사와 민주당 간부, 합기도 도장과 소금공장을 경영하시는 비교적 부유하게 사는 대구의 유지였다. 나는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고, 서복섭 씨 부부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3월에 들어서면서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었다. 그동안 서동진 국회의원을 몇 차례 만났는데, 서동진 의원도 상당히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서동진 의원과 만나 “3월 21일이 저의 졸업식 날인데 졸업생들을 위하여 축사를 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해주셨다.

서동진 의원은 졸업식 날 오셔서 “대사(大師) 출신을 며느리로 삼겠다.”는 요지의 축사를 해주셨다. 이 내용은 우리 동기생들의 졸업앨범에도 나와 있다. 국회의원이 대구사범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라고 학교당국으로부터 들었는데,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나는 서동진 의원의 선거운동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서동진 의원과 서복섭 씨의, 요청에 의해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나의 임무는 하루에 대여섯 차례씩 각 동네를 돌면서 유세하는 상대 후보 신도환(辛道煥) 씨의 연설 요지의 전달과 다음 유세장에서 서동진 의원이 한마디로 상대 후보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압축된 연설문을 만드는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따라다니면서 신도환 씨의 연설을 하루에 대여섯 번씩 신물이 나게 들었다.

1958년 3월 31일,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제외한 우리 동기생 전원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나는 성주초등학교로 임지가 결정되었는데, 선거는 아직 32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서동진 의원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발령지로 가겠다고 하니 서동진 의원은 “장군이 초등학교로 가는 것은 좋으나 장군의 꿈이 상당히 큰 줄 아는데 내가 당선이 되면 비서로 국회에 같이 들어가지.” 하고 간곡히 말씀하시기에 누나와 의논해서 성주초등학교 발령을 취소했다.

5월 2일의 선거에서 서동진 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불량배들의 난입과 부정개표로 인해9서 결국 신도환 씨가 당선되었다.

서동진 의원은 나에게 몇 차례 미안하다고 말씀 하셨으나 선거의 결과는 누구도 번복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서동진 씨와 함께 국회로 갔다면 지금 나의 운명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신도환 씨는 그때 당선이 되어 반공청년단장이 되어 3.15 부정선거와 4.19를 유발시킨 역사의 죄인으로 재판을 받았다.
 
▲ 서동진 의원과 신도환 의원에 대한 기사 (경향신문 1958. 10.14.)

서동진 의원이 낙선하자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물론 선거운동 중에도 반실업자였지만 당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취직할 데가 없어서 대다수가 실업자생활을 하고 있었다. 직업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시대였다.
 
졸업식 때 <칡넝쿨> 문학동인들 이외에 졸업을 축하하러 온 다른 고등학교 출신은 장두성, 류재정, 최형태, 김종학, 정해걸 등이었다.

나는 졸업할 무렵부터 선거운동 중에도 경북대학교 병원 근처에 있는 동산목욕탕 2층 <백도라지다방>에서 거의 매일 류재정과 최형태를 만났다. 얼마 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조영윤이 우리 그룹에 합세했다.

류재정은 연극에 취미가 있어서 극단과도 관련을 맺고, 여러 차례 연출도 한 친구이다. 그러면서도 전국체전 검도(劍道)시합에서 우승한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최형태는 우등생이었으나 계모에게 학대를 받은 정신적 부담으로 항상 사회에 불만이 많은 친구였다 .음악에 취미가 있어서 키타 연주와 음악감상에 열중하면서도 나에게 경음악을 자주 들려주었다. 그의 집 전축에서 들은 경음악 소리가 너무 좋아서 나는 지금도 그때 듣던 음악을 즐겨 듣곤 한다.

‘체인징 파트너’, ‘러브 미 텐더’, ‘아이 윈 트 유어 웨딩’ 등의 30여곡과 ‘자이언트’, ‘OK목장의 결투’, ‘케 세라 세라’, ‘자랑스런 사나이’ 등의 영화주제가  등이 있다.

그 음악들은 그 후 ‘시보네’와 ‘아나스타샤’ 경음악실을 출입하면서 자주 들었는데, 음악실에 갈 때마다 ‘체인징 파트너’는 꼭 신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시보네 음악실에 들어가서 ‘체인징 파트너’를 신청하자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미모의 아가씨가 “파트너 바꾸고 싶으세요?” 하고 물어왔다.

당돌한 질문에 너무 당황해서 물끄러미 쳐다보니 자기는 지금 ‘체인지 파트너’를 하고 싶은데, 의향이 어떠냐고 하는 질문에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최형태가 들어와서 그 자리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어쨌든 요즈음도 나는 호텔 로비나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 장소에 가면 이곡들을 신청한다. 그리고 그 당돌했던 아가씨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가끔 생각한다.

최형태는 소매치기단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친밀히 지내면서 그들을 제압할 만큼 담력이 세어서 주먹패들과 충돌이 있을 때는 항상 앞장을 섰다.

조영윤은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머리도 우수한 친구였지만, 운동과 노래에 아주 소질이 많은 친구였다. 전국체전에 복싱 페더급에서 우승했고, 노래 수준도 가수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58년 무렵은 6.25 전쟁이 끝난 지 5년밖에 안 되었고,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질서가 없는 시대였다. 경제사정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상이군인들과 깡패들이 도처에서 위세를 부리는 혼란기였다.

조영윤과 나, 류재정, 최형태, 우리 네 사람은 매일 <백도라지다방>에서 만났다. 다방 주인과 레지 미스강이 우리들을 단골손님으로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다.

깡패들이 다방에 와서 고함을 지르고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최형태가 앞장서서 그들과 시비를 걸고, 우리들이 합세해서 골목으로 끌고 가 그들을 흠씬 두들겨서 다시는 다방 근처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했다. 네 사람이 모두 두셋쯤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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