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여고로 전근 (21회)

당시 명지여고 이응호 교장 선생은 명지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겸직하고 있었다. 한인수 교수는 나를 이응호 교장선생께 인사 시키시고 나의 이력서를 제출했다.

이응호 교장 선생은 인상이 매우 부드럽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서 상당히 호감이 갔다. 교장 선생은 한 시간 정도의 나의 경력과 교육문제들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나를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헤어지기 직전 교장 선생은, “장 선생, 내년 3월부터 명지여고에 인연을 맺읍시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 명지대학 강의도 좀 맡으시고, 이 건물 8층에 명지대학 대학원이 있는데 박사과정에 입학하면 5분이면 대학원에 갈수 있습니다. 대학원 등록금도 명지재단에 근무하는 교직원들은 반액으로 장학 혜택을 주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상당히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내가 평소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말씀해주셨다.

나는 흐뭇한 마음이 들어서 “내년 3월부터 인연을 맺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한 후에 명지여교를 나왔다. 그 후 순위교사를 쳐야 한다고 해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주관하는 순위고사에 합격하여 1975년 3월 1일부로 명지대학 부속 명지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열리는 직원조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봉독과 기도를 하는 조도회가 신앙을 거듭나게 한 것이다.

2월 25일 직원조회에서 교장선생이 신임교사를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할 때 나는 명지여고에 발령된 것이 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신임교사 18명 중에서 서울대 13명, 연세대 1명, 이화여대 1명, 한양대 1명, 명지대 1명, 그리고 지방대 출신인 나였다. 명지대 출신은 명지대학 전체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박윤빈 체육교사였다. 박윤빈 선생은 지금 명지전문대학에서 우수한 체육교사로 평가받고 있다.

나는 고3 담임이 되었다. 국어는 현대문을 이광풍 선생과 내가 맡고, 고전은 조낙현 선생이 맡았다. 두 분 다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다. 학생들은 학벌에 프리미엄을 주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출신은 수업의 충실도가 좀 모자라도 그럴 수 있으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다른 대학 출신들에게 똑같은 경우가 생기면 문제가 되었다.

나는 내가 닦은 노하우대로 열심히 수업에 임했고, 동료들과의 유대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면서 서울대 사대출신들이 그룹을 지어서 학교의 헤게모니를 잡으려고 하는 기미가 있었다. 그들은 서울사대 출신인 교장을 등에 업고 자기들이 세를 과시하려고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 서울 사대 출신들이 아닌 교사들은 상당한 반발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 명지여고로 전근오기 전 근무했던 상서여고 소풍에서

그 시기에 나는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고, 이응호 교장선생의 권유에 따라서 <서대문 성결교회>에 입교했다. 원래 나의 신앙은 장로교 고려파 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때부터 성결교회로 옯기게 된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새 학기가 되었다. 평준화 1기생이 3학년이 되어 학교에서는 새로운 3학년에 학교의 명운을 걸었다. 나이가 들었거나 서울의 일류대학교 출신이 아닌 고등학교 교사들은 대다수 중학교로 내려 보내고, 고등학교는 서울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는 교사진용으로 짜여졌다.

그때에 명지여고 교사들 대부분은 신년도 고3주임에는 장윤익 선생이 아니면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출신인 전재근 선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서울사대 출신인 H선생이 고3주임에 임명되었다. 의외의 결과에 모두 놀라면서 학원 경영에서 윗사람에 대한 접대의 노하우를 닦은 H선생의 수완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서울사대와 비 서울사대 교사들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교장 선생이 은근히 서울사대를 편드는 일에 대해서 당시 명지대학 재단인사들과 정보를 교류하고 있던 교사들 중 일부가 교장이 특정학교 출신들만을 편애하는 학교 경영을 하고 있다고 재단에 정보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9월 하순경 이응호 교장선생이 명재대학교 도서관장으로 발령이 났다. 후임 교장으로는 명재대학교 영문과 교수이시며, 학생처장으로 계시던 이대영 박사가 오시게 되었다.

그때 나는 고3 담임을 하면서 국어과 학과주임을 맡고 있었다. 국어교사 12명 중 8명이 서울대학 출신이고 비 서울대학 출신은 4명밖에 안 되었다. 12명 중 9명이 대학원출신이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들에게 “한 달에 한번 월례 논문발표회를 하면 어떠냐?”고 제의했다.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찬성을 해서 그해(1976) 가을부터 논문발표회가 있었다.

다들 우수한 선생님들이기 때문에 논문발표회는 매우 알차고 진지했다. 발표요지의 작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날카로운 질문들이 나와서 발표자들을 쩔쩔매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 어떤 교사는 발표 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쓰러지는 촌극도 일어났다. 교장, 교감 선생님이 참석해보시고는 깜짝 놀랐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명지여고 국아교사들은 정말 우수했다. 얼마 후 이광풍 선생은 명지대학교, 정상균 선생은 서울시립대학교, 조낙현 선생은 광동대학교, 한석수 선생은 충북대학교, 김병욱 선생은 인천대학교, 홍태식 선생은 명지전문대학, 내가 관동대학교와 인천대학교 등으로 진출한 사실은 당시의 명지여고 국어과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대영 교장 선생이 하루는 나를 불러서 국어과 선생님들 중에서 학교 교지에 권두사를 부탁해야겠는데, 선생님 한 분을 추천해달라기에 젊은 교사 한 분을 추천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도저히 못쓰겠다고 해서 내가 대신 써드렸더니 글이 마음에 든다고 교장선생님께서 매우 기뻐하셨다.

한 달 후 쯤 졸업식 행사의 순서에 잡혀 있는 학교장 회고사(回顧史)를 부탁하기에 이것도 쓸 사람이 마땅치 않아 내가 써드렸더니, 이 회고사 때문에 재단이사장과 재단이사들로부터 교장 선생이 대단한 찬사를 받아서 기분이 매우 흐뭇해 있다는 사실을 교감선생으로부터 전달받았다. 교장선생도 서울사대 출신이지만 그때부터 나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2학기가 거의 다 지나갈 무렵 교장선생이 나를 찾았다. 새 학기의 보직과 담임발령을 위해서 찾으신 것 같았다. 교장선생이 나에게 “장 선생님은 학사행정을 하시렵니까, 아니면 공부를 하시렵니까?”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교장선생의 의도를 곧 알아차렸다.

당시 안정희 교무과장이 간암으로 입원하여 거의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누가 해도 교무과장 자리는 신학기에 발령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무과장을 맡겠느냐?”고 하는 물음 같아서 나는 공부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교장 선생은 “명지전문대 학장과 명지대학 국문학과 성백인 학과장을 찾아보라”고 말씀 하시면서 “장 선생에게 강의시간을 배정해달라고 두 분에게 부탁드렸는지 잘 될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