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되는 길을 찾아 함께한 전국일주 (27)
  제12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3

교수되는 길을 찾아 함께한 전국일주 
류해춘
<성결대학교 교수>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1986년 그해 겨울 내가 박사과정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후, 장윤익 교수님과 같은 학교에 있는 선배님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교수님을 만난 것이 벌써 20년이 다 되었다. 

대구에서 인천으로 찾아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내 모교의 선배님이라고 하시기에 나도 정이 더욱 갔으며, 처음으로 만나 뵙는 교수님의 인상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다정하시며 유머가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2년이 지난 후 교수님이 학장이 되시자, 나는 교수님이 담당하시던 강의 시간의 일부를 맡아서 출강을 하게 되었다. 고달픈 시간강사 생활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나는 인천에 가서 강의를 하기 위하여 새벽 4시에 대구에서 서울로 떠나는 통일호 열차에 몸을 싣고 7시 50분쯤 영등포역에 내려서, 인천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고 제물포역에 내려서 인천대학교에 도착하곤 했다. 

어떤 학기에는 인천대학교에서 오후에 시작하는 강의를 하게 되면, 대구에서 아침 8시쯤 출발하는 통일호나 새마을열차를 타고 영등포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인천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여섯 시간의 강의를 마치게 되면 저녁 8시가 넘었다. 

학교에서 제물포까지 걸어 나와서 차를 기다리고 하다 보면, 종종 서울에서 밤 11시 30분에 부산으로 출발하는 새마을호 열차를 타게 되는데, 대구에 도착하는 시간이 보통 새벽 3시에 가까웠다. 물론 잠을 자다가 부산까지 간 적도 있었다. 여름철에는 대구에 내려서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4시가 가까워져서 먼동이 터서 오르기도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던가? 그 시절 이후부터 나와 교수님은 내가 1998년에 서울의 남쪽에 있는 성결대학교의 교수가 되기까지 거의 10년 동안 ‘나의 교수되기 프로젝트’에 동참하여 전국을 다니게 되었다. 

1990년 부산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채용이 있었을 때, 교수님은 나와 함께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그 대학의 사정을 알아보시고 나에게 교수가 되는 절차와 그 방법을 자세하게 안내를 하여주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나는 교수채용과 관련된 응모과정과 그 절차 등에 대하여 교수님께 많은 자문을 받았다. 그 당시에는 교수님께서도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시지 않고 친절하고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후 1992년에는 교수님은 경주에 있는 대학교에 나를 추천하였다. 그해 11월인가, 12월인가 아마도 인천에 강의를 나왔다가 교수님을 만났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이력서를 가지고 서울의 세종호텔에서 그 대학의 설립자와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그날 아침 나는 약속시간 보다 2시간 가까이 일찍 호텔에 도착하여 이발도 하고 면접할 만반의 준비를 하여 설립자와의 면접을 무사히 통과하여, 다음 학기부터 그 대학에 교수가 되는 것으로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이 나를 비켜갔는지, 그해 여러 가지의 사정 때문에 그 학교와의 인연을 접어야만했다. 
 
▲ 류해춘 전 성결대 교수

1993년에는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나는 다시 제주도에 있는 대학과 부산에 있는 대학에 동시에 응모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예상 밖으로 신통하지 않아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교수님께서는 가끔 전화로 위로를 주시기도 하였고, 만나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1994년 겨울에는 충북에 있는 대학에 교수채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수님은 직접 중앙선을 타고 내려와서 그 대학의 총장님께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고 난후 교수님과 함께 경치가 아름다운 중앙선을 타고 제천에서 대구까지 내려오면서 교수님께서 경험하신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1995년과 1996년에는 교수님의 소개로 대구에 있는 몇 대학에 강의를 하면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응모하여 면접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를 교수님께 말씀 드렸다. 

1990년부터는 인문학을 전공하여 대학에 교수가 되기가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몇 번에 걸쳐 좌절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였지만, 교수님께서 옆에 계셨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997년 겨울, 우연히 신문광고란에서 교수 공채라는 면을 읽게 되었다. 현재 내가 봉직하고 있는 성결대학교의 교수공채라는 광고에 나의 전공인 <고전문학> 분야도 함께 들어 있었다. 

교수님과 함께 전국을 일주하면서 들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문득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아마도 그 대학(성결대학교)의 재단이사가 교수님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면서도 아침 7시쯤 교수님께 전화를 했다. 안양에 있는 대학교에 교수공채가 신문에 나왔는데 “저도 응모를 하고 싶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교수채용 응모원서를 직접 학교에서 받아 가야 하는데, 나는 대구에 있는 관계로 서울에 사는 고종사촌 여동생에게 시켜서 우편을 대구로 교수응모원서를 부치게 했다. 그리고는 우편으로 성결대학교 교무과에 교수공채의 원서를 접수하고서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성결대학교에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그때 다시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면접을 보는 방식과 다양한 상식을 안내해주셨다. 교수님은 다음날 면접을 볼 때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시범강의를 하고, 또 면접을 하였다. 벌써 대학의 면접과 시범강의가 몇 번이던가?> 나는 지금까지 시범강의와 면접을 완벽하다고 할 만큼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국문학>을 전공하였지만, 영어로 강의하는 것도 준비하였고, 영어로 자기소개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준비하였다. ‘준비된 대학교수’라며 나는 친구들과 함께 농담도 곧잘 하곤 하였다. 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러질 때가 있다’라는 속담처럼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면접과 강의로 단련된 내가 우연히 던지는 면접관의 유도질문에 넘어갔다. 

면접을 할 당시에 한 면접관이 “술을 맥주를 좋아하느냐, 아니면 양주를 좋아하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맥주’라고 대답했다. 면접을 마친 후 전화로 그 이야기를 교수님께 드렸더니 기독교 학교에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 되느냐고 펄쩍 뛰셨다. 속으로 나는 ‘이제 끝났구나’하고 단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쯤인가 다시 최종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와서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매우 반가워하시면서 다음에 있을 이사장님과 총장님의 면접을 잘 보라고 격려해주셨다. 

1997년 12월 초순의 어느 날,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데 성결대학교 뒷산이 수리산에는 그해 첫눈이 내려 삽시간에 하얗게 변하여 겨울의 정취를 만끽하게 되었다. 

그후 1997년 12월 중순에 교수님께서는 성결대학교 재단이사회를 하시던 도중에 나에게 전화를 하여 1998년 3월부터 교수임용 예정자로 결정되었다고 연락을 주셨다. 

이렇게 교수님과 함께 한 ‘나의 교수되기 프로젝트’는 1986년 겨울 인천의 제물포에서 시작하여 부산, 경주, 제주, 대구, 제천, 서울 등을 거쳐 전국을 일주하면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 관악산과 청계산을 바라보는 수리산 밑의 성결대학교에서 1998년 3월에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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