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하는 대학총장 (29)
  제12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3

청강하는 대학총장
이예성
<경주대학교 외국어학부 영어전공 교수>

오늘날의 삶에서 ‘느리게 살기’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예를 들면, 김경미 시인은 <바다 내게로 오다>라는 수필집에서, “사람에겐 누구한테나 두 가지의 스케줄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타인과의 스케줄과 자기 자신과의 스케줄. 얼마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곧 저만의 묵언기간, 저만의 하안거, 마음의 심해, 그곳으로 가 있고자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 W. H. Davies라는 시인은 “Leisure"라는 시에서 그야말로 하늘 한번 쳐다보지 않을 만큼 바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눈꼽만큼의 여유도 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할일이 잔뜩 쌓여있더라도 한가로운 시간을 내어 자기만의 순간을 소중하게 즐기려고 애쓰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때때로의 한가로움에 삶의 생명력이 있고 삶의 지혜의 번뜩임이 있다. 

어니 J.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 : Smart Ways to Slow Dawn and Enjoy Life)에서 느리게 살기 위하여 어떤 일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생 택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으며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느리게 살기는 참 쉽다 하다못해 어쩌다 한번 얇디 얇은 <어린왕자> 한권만 읽어도 되는 것이다. 

우리 경주대학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는 아마 그 캠퍼스가 우리나라에서 대학 구성원 1인당 소나무가 가장 많을 곳 일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마 공기도 가장 맑은 대학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싱싱한 나무숲속 어느 한켠은 나의 성소(聖所)다. 그곳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장소이지만, 사실 한 쉰 방자국만 걸으면 누구라도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를 거의 찾지 않는다. 수북하게 쌓인 솔잎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바쁠수록 일부러 거기를 찾아가 그냥 앉아 있기도 하고, 책도 한두 쪽 쯤은 들춰봤을 것이다. 그곳은 조그만 나의 천국이다. 나도 가끔씩 느리게 살아보려고 꽤 애를 써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유로움의 멋, 느리게 사는 멋, 유유자적함의 기쁨을 제대로 아는 분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장윤익 교수님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분은 <김동리, 박목월 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 <국제언어문학회> 회장 등의 공직을 맡아보시며 늘 바쁜 사람이다. 
 
제목 없음.png
 
그리고 이 분은 몇 년 전 우리대학의 총장의 일을 하시며 불철주야 뛰어다니신 분이었고, 그리하여 우리 경주대학 구성원들이 다 인정 하는 바, 오늘날의 우리 경주대학의 터전을 닦으신 분 가운데 한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분을 뵙게 되면 바쁘게 움직이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 분한테는 언제나 유유자적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경주가 고향인 이분은 마치 서라벌에서 문무(文武)를 닦던 화랑들의 풍류정신을 이어받은 것 같다. 이분한테는 모든 것이 늘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 같다. 이 분의 풍류정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드러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대화다. 

이 분은 배우고 대화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아주 커다란 행복감을 느끼는 분 같다. 이 분과 어울리며 대화의 행복감을 누린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분은 국내외에의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늘 진지하다. 내가 2년간 총무이사로서 활동한 적이 있는 <국제언어문학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이분이 늘 발표자들과 서슴없는 토론을 즐기시는 것을 여러 번 본적이 있다. 마치 다른 토론자들이 먼저 물을세라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진지하게 묻고는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시는 것이다. 

물론 학술대회가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서도 그의 대화는 계속된다. 특히 일본의 학자들과의 국제학술대회에서의 토론을 통한 이분의 일어구사 능력 또한 아주 훌륭한 것이어서 일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늘 이분을 부러워하곤 했던 것이다. 

나는 우리 대학 총장이 청강하는 가운데 두 시간의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10여 년 전쯤의 가을학기에 나는 영어과 4학년 과목인 <영미산문>이라는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 의해 널리 읽히는 영국과 미국의 문학인들과 수필가들이 쓴 글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가을 학기 어느 날 우리대학 총장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수업을 꼭 듣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어보셨으며 나중에 정말로 수업시간에 청강을 들어오신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총장의 수업참가에 대하여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우리 대학 총장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그만한 정신적 여유를 찾기 어려운 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수업에 꼭 들어오고 싶어 한분은 다름 아닌 당시의 총장이신 장윤익 교수였다. 

이 분께서는 다른 대학에서 일반 교수로 혹은 총장으로 재직하실 때에도 관심분야의 과목에더러 청강도 하신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내가 맡은 과목에 들어오실 줄은 몰랐다. 자기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총장이 자기의 시간에 들어와 수업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부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한 대학의 총장이 자기의 관심분야에 대하여 오로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청강을 하더라도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괜히 어떤 흠이라도 잡힐까봐 신경이 쓰이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때 이분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였지만, 이 분을 보면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이 분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남을 높일 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이 분의 유유자적함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우리 대학 총장이신 장윤익 교수께서 청강하는 가운데 이 날의 수업을 통해 여러 편의 <영미산문> 이외에도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 폴 베를렌느의 <가을의 노래>(Chanson D'automne)라는 시를 학생들에게 소개해주었다. 

나는 독일어 공부는 아주 열심히 하였지만 불어공부는 못하였기 때문에 불어발음이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난 그날도 불어공부를 못했음을 마음속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이 시를 불어원문으로 한번 읽어보아도 되겠느냐고 손을 든 수강생이 있었으니, 청강생 장윤익 총장님이었다. 

그 불어 원문을 한번 읽어보시겠다고 손을 든 이 분의 태도로 보면 이 분은 한 명의 젊은 대학생과 다름없었으며, 자기 자신이 이 대학의 총장이라는 이라는 생각도 별로 하시지 않는 것 같았으며, 다른 학생들도 이 분을 그냥 한 사람의 학생처럼 대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일어와 불어도 아주 잘하시는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이신 이 분은 이 시의 불어원문을 아주 멋있게 읽어내셨던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국문학자는 외국어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외국어 문학자는 우리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전형 가운데 한분을 장윤익 교수에게서 발견하고는 마음이 참 좋았던 것이다. 

이 분이 그 멋진 시의 불어원문을 멋있게 읽어냈을 때 그 순간 나는 불어에 관한 한 학생보다도 못한 선생일 수밖에.......

이처럼 이분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가고, 얼마든지 누구와도 대화하시는 것 같다. 아마 이 분이 이룬 학문의 상당 부분은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이 분은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얼마 안 되는 낭만주의자 총장 가운데 한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은 젊었을 때 학자의 길을 가며 겪었을 법한 어려운 일도 크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이러한 점은 아마 그가 유유자적함에서 나온 것은 아닐는지? 사실, 바람직한 학자들 가운데는 젊은 시절에 학업을 계속 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 많은데, 이 분도 아마 그러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것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이 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나의 죽마고우의 얘기를 통하여 이 분이 학문의 길을 걸어가실 때 겪었을 수도 있을 어려움의 한 단면을 추리해보았을 뿐이다. 

아마 나의 친구가 얘기해준 인물이 장윤익 교수님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을 괄호 속에 넣는 이유는 나중에 이분과 껄껄 웃으며 한번 확인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경주대학교 발전의 초석을 쌓으셨도다 (28)
  장윤익론 (30)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