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익론 (30)
  제12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3

장윤익론

박기태
<경주대학교 방송언론광고학부 교수, 전 기획처장>

1. 그와의 만남 

장윤익, 그는 내가 알기로 우리 문단의 중진(重鎭) 평론가이다. 그러나 나는 문단 사람이 아니기에 그를 대학이라는 배움터에서 만나 올해로 꼭 10년째 알고 있는 사람이다. 

1995년 2월 어느 날, 그는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경주대학교의 총장으로 금의환향(?)을 하였고, 나는 이제 대학교수라는 배우고 가르치는 학문의 망망대해의 처사 항해를 시작하는 전임강사로 만났다. 입장은 교육자의 정상과 바닥이라는 데서 서로 달라도 우리 사이는 남자들이 평생 동안 동지애를 가지고 산다는 이른바 전입동기가 된다. 

그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나는 지금 평생 그가 써왔던 대로 OO론, OOO론을 따라 <장윤익론>이라 이름을 붙여 그를 적어보려 한다. 

다만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문학세계를 논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의 문학 세계를 말할 만큼 문학을 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에게서 박아무개론 한편은 고사하고 촌평이라도 한번은 받을 수 있다면 좀 좋으랴 싶은 속내를 숨길 수는 없다. 


2. 내가 본 그의 일과 사람 사귐
- 우리 시대 선비의 길을 올곧게 걷는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에서 대학교수, 총장까지 교육의 바탕에서 천정까지를 모조로 섭렵한 교육자를 장윤익 말고는 다시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두루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다. 그런데 이 과정은 모두 그가 우리에게 보태지도 않고 덜지도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들어주어 다 아는 일이다. 

요즘 세상에 지난 세월이 현재보다 손톱만큼만 모자란다 싶어도 덧칠하고 지우고 감추며 지금만 뽐내기에 급급한 인간들만 보자니 참 기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상급학교로 출세를 위해 건너뛰고, 밟고 달음질쳐 오른 것이 아니라 기초에서 가장 넓고 높고 깊은 학문의 세계를 향하여 차근차근 순리에 따라 나아가며 참교육인생 40여년을 살아온 교육문화재이다. 

남들은 인생에 한 번도 하기 힘들고, 더구나 탈 없이 배겨나기 힘든 사립대학교 총장을 두 번씩이나 지내고 절묘한 시기에 끝냈다. 

그래서 나와 동료들은 아마도 그의 평생의 화두는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라고 노래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洛花)>가 아닐까 짐작한다. 진퇴를 분명히 하고, 그 시운을 절묘하게 아는 그에게는 가히 동물적 판단이 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동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쌓인 단수 높은 내공의 힘이 있음이 분명하다. 

두 번째의 총장직은 익히 아는 바지만 평생의 친구가 세운 학교이며 그 세운이의 내공 또한 만만치 않음을 세상이 다 아는데, 그 와중에 때로는 ‘밀월로 보이는 불화의 시간’을 때론 ‘불화를 가장한 밀월(?)’로 구성원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그 험난한 총장 직을 탈 없이 수행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를 그리워한다. 

우리는 모이면 그를 보고 학교 꾸리는데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른 분이라고 말한다. 

공부에 내공 또한 경지에 이른 선비의 자세를 보인다. 그의 전문 분야인 ‘문학평론’에 대해서는 말할 입장이 아닌바 접어두고 공부하는 자세에서야 말로 후학들이 본받지 않을 수 없는 모범이 있다. 

어느 날 일본말 공부한다고 몇몇 선생들이 개인교수를 모셔놓고 떠듬떠듬 시작하는 듯 하더니 끝내는 일본학회에서 발제를 하는 기염을 토한다. 어느 날은 들고 다니는 가방을 흘깃 보니 뜻밖에도 서양사학자 차하순 교수의 <서양문화사>가 모소리가 닳고 책장이 해질만큼 읽은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은가. 영역을 넘나들며 쉬지 않고 공부하는 이것이 곧 그의 학문적 내공의 바탕임에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그는 ‘어당필’이다. 어리숙해 보여도 당수가 팔단(八段)이라는 농반진반의 찬사다. 한없이 부드러우나 결단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야 마는 무서운 집념을 가진 이가 내가 아는 장윤익이다. 그러면서 넘치지도 쳐지지도 않는 중용의 도리를 아는 선비의 본 모습을 잃지 않는다. 늘 웃음으로 대하되 결코 비굴하지 아니하고 부드러우나 질기고 강인하며 세인의 선생이 되는 참 선비로 글 읽고 나아가 경영하며 다시 돌아와 글방을 지키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귐을 보라고 한다. 장윤익, 그이의 주변에는 참으로 기인이 많다. 내가 따르며 지켜보는 그의 평생 지우 가운데는 어찌 그리도 인류학적 연구표본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개성 뚜렷한 분들이 많은지 존경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여간이 아니다. 

마치 물 흐르듯 교류하는 것을 보노라면, 아하! 저것이 군자의 사람 사귐은 물 같아라(君子之交淡若水, 군자지교담약수) 함의 표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몇몇은 그가 선사하는 ‘유쾌한 지루함’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한다. 

소로본느 시절의 세느강, 몽마르트가 생맥주잔이 차오르던 그날 밤은 아무래도 캐나다까지 대륙을 돌고 돌아서 자정을 넘겨서야 본국에 돌아오기 일쑤이다. 

몇 번씩 같은 줄거리가 반복되면 좌중은 또, 또 하지만 때론 느닷없이 60년대 군대시절로 돌아가 있거나, 아무 연분의 교사시절로 돌아가 좌중에게 유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장윤익, 그는 때론 어술프다. 늦게서야 시작한 운전은 아직도 서툰 끼가 역력해 그의 하얀 승용차 범퍼는 지금도 어느 한곳이 찌그러져 있을 것이다. 눈다락지 때문에 ‘쿡선장’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등산하다 넘어졌다며 팔을 어깨에 맨 ‘상이군인’이 되어 나타나 우리에게 가벼운 걱정거리를 안기더니, 급기야는 찬 바닥에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굳가락 조차 들지 못하여 우리들 가슴이 철렁 내려앉도록 큰 걱정을 끼친다. 

그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땐 정말이지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내 되돌아와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간다. 경주 사람이 몇 년을 두고 밀고 당겨도 지지부진한 <동리, 목월문학관> 건립사업을 그의 뚝심이 기어이 첫 삽을 뜨게 하였다. 평생지기인 친구 분조차 혀를 내두른다. 

내 어머니 연배인 그에게 인품을 말할 용기는 없다. 그래도 그를 논하라고 했으니 뭐라도 말해야 한다. 그는 평론가이다. 평론가는 모름지기 따지는 글을 쓴다. 무엇이나 따지자면 자연히 ‘무슨무슨’ 증거를 들이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의 ‘누구누구론’을 가만가만 읽어보면 ‘그러나’라는 역접어가 귀하다. 

대개 ‘그러나’로 시작하면 지금까지는 더 좋다거나 그런대로 괜찮은데 그 뒤에는 뭔가 마뜩찮다는 꼬리를 붙일 때 쓴다. 말하자면 시비를 거는 것이고 칭찬보다는 흠잡을 때 시작한다. 

장윤익 글 <서영수론>에는 한번, <신동집론>에도 한번, <김춘수론>에는 두 번이 나온다. <정민호론>에는 아예 한번도 ‘그러나’가 없다. 인품이 이렇듯 남을 폄훼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론가로서 크나큰 흠결(?)이 아닐까. 그래도 내가 아는 장윤익에게서 이것이 곧 그를 정상에 올릴 가장 큰 힘이자 매력이라 확신한다. 
 

3. 우리를 떠나는 장윤익, 우리에게 남는 장윤익

10년을 모신 장윤익 선생님께서 벌써 정년을 맞이하신다.

내 입장에서는 한없이 넓은 큰형님 같고, 감히 뵙기조차 힘든 큰 선생님으로 계신 것이다. 장윤익 선생님이, 그리고 장 총장님이 보여주신 10년 세월은 망년의, 친구(親舊)로의 사귐이 ‘참 사귐’이라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채 내 것으로 하기도 전에 떠나려 하신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결코 떠나지 못할 것이다. 뜻하는 바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붉은 콧망울의 실핏줄에 열정이 식지 않는 한 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창랑에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에 물이 흐르면 발을 씻는다.’는 명징한 선비의 서릿발 같은 가르침을 떠올리면 장윤익 선생은 우리 덜 익어 어설프게 선비연하는 후배들에게 결코 발을 담글 수 없는, 그리하여 비록 아둔하지만 그 머리라도 행굴 창랑의 맑은 물로 유유히 흐를 것이다. 

 
  청강하는 대학총장 (29)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신 선생님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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