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든든한 버팀목이신 선생님 (31)
  제13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4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신 선생님

여세주
<경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선생님은 나에게 언제나 든든한 후견인이셨다. 내가 처음 우리 대학에 오게 되는 과정에서 그러했고, 전임 교수와 시간강사의 관계로 만났을 때에돟 그러했다. 평교수와 총장님의 관계로 만났을 때도, 같은 학과의 동료교수로 만났을 때에도 선생님은 항상 나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셨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경주대학교에서 <교양국어>를 강의할 전임교수를 뽑는다는 공채공고가 났다. 이력서를 제출하려니, 제출서류 가운데 외부인사 추천을 요구했다. 믿을만한 보증인을 세우라는 말이었다. 대학 측과 각별한 관련이 있는 분을 추천인으로 내세워야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보증인이 되어줄 추천자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력서를 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공대 교수로 계시면서 나의 은사이기도 한 김원중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스크바에 가려고 하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 대구공항까지 차를 태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선생님을 모시고 공항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이번 학기에는 어디 이력서를 낼만한 곳이 없느냐”고 선생님이 내게 물어왔다. “경주대학에 공채가 있으나, 특별히 추천해줄 사람이 없어서 아직 생각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경주대학 설립자와는 장윤익 총장이 잘 안다고 하시면서, 나중에 장 총장을 만나 동의를 얻어 낼테니, 장윤익 총장을 추천자로 일단 써내”라고 하시면서 김원중 선생님은 모스크바 비행기에 오르셨다. 

‘장윤익 총장님’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대학 동문들에게서 까마득한 선배인 선생님의 명성을 이미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었던 터였다. 

총장님과 첫 통화를 했다. 다짜고짜로 “경주대학교에 이력서를 내려고 하는데, 추천을 좀 해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러나 “진작 이야기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다른 사람을 추천해놓은 상태라 또 한 사람을 어떻게 더 추천하겠느냐”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이신 심재완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고, 지인의 한 사람으로 장윤익 총장님의 성함을 적어, 경주대학교 신임교수 공채에 이력서를 넣었다. 나는 그 해에 경주대학 교수 공채에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영광을 얻었다. 아직은 한 번도 뵙지도 못한 상태였으나, 선생님은 이이 이때 나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경주대학 공채된 이후, 대구에 오신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났고, 어느덧 선생님과 나는 종종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엔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통화를 했던 것 같다. 선생님과의 통화 내용은 응당 학내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에 경주대학교는 교명 변경 문제 등으로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을 때였다. 학교 존립이 풍전등화와 같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대학신문사 주간 교수의 일을 맡게 되었으므로, 학내의 갈등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다. 강의보다는 학생기자들과 기사 내용을 조정하는 일로 분주하였었다. 학생기자들과도 부딪혀야 했고, 총장님과도 의견 다툼을 해야 했다. 대학사회의 초출내기인 내게 선생님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던지.......

경주대학에 부임한지, 일 년이라는 시간을 넘고 있던 2월 중순 어느 추운 날이었다. 대학본부에서 연락이왔다. “인천대학 총장을 역임하셨던 장윤익 총장님을 잘 아느냐, 총장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 경주에 내려올 일이 있는데, 그때 몇시간의 강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가능하겠느냐”고 요청해왔다. 

이미 외래강사를 섭외하여 강의 시간표를 다 짜놓은 뒤인지라 선생님께서 원하는 그 시간에 몇 시간의 강의를 배정할 수 없었다. 교무처에 시간표 조정의 가능성을 문의한 후,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며칠이 지난 후 대학본부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 여세주 교수 [출처 ; 여세주 교수의 수필교실]

“다음 학기 시간표가 모두 확정되어서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가 “설립자로부터 그것도 하나 못해내느냐는 식의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윤익 총장님을 잘 아는 사이라면, 직접 전화를 하여 양해를 구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해왔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미 시간표가 확정되어서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요일에 강의시간을 배정할 수 없다고 평생을 대학에 몸담고 계신 선생님이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선생님의 일정을 우리 대학의 정해진 시간표에 맞추기로 하였다. 사태가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그런 곡절을 겪으면서 선생님은 일 년간 우리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출강하시는 날, 썰렁했던 내 연구실은 선생님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로 가득 찼다. 출강하신 일 년 동안, 학내문제에서부터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조언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으니, 선생님의 깊고 넓은 인생의 경륜은 이때에도 더할 나위없는 나의 후원자 구실을 했다. 

이듬해 선생님은 우리 대학의 총장님으로 부임하셨다.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이제 총장님과 평교수의 관계로 바뀌었다. 선생님이 우리 대학의 총장님으로 부임하시면서, 혼란스러웠던 학내 사태도 진정되었다. 그 대신 교육개혁이니, 특성화사업이니 하는 일들이 학내를 바쁘게 만들어갔다. 

선생님께서 우리 대학 총장님으로 부임하신 후, 우리 대학은 대학으로서의 체계를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지역사회에서도 우리 대학의 위상이 달라져갔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다시 공부하는 일에, 교수들은 연구실로 돌아가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만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혼란의 와중에 빠져있었던 우리들 모두에게 선생님은 총장이기 이전에, 따사롭기 그지 없는 든든함으로 자리하고 계셨던 것이다. 

부임하신 이듬해에는 총장님의 후원을 얻어 문예창작학과를 개설하고 1996년에 첫 신입생을 뽑았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는 지금도 태어나지 모르고, 나는 아마도 교양학부에서 교양강의를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문예창작학과를 만들었기에, 나는 내 전공을 제대로 찾아서 이렇게 제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신명을 쏟을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선생님께서 4년간의 총장 일을 마치시고 학과로 오셨으니, 이만큼 든든한 후견인이 어디 있겠는가. 학과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고, 선생님은 흔쾌히 궂은 일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맡으신다. 선생님께서 학과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거늘, 학과의 뒷일까지 챙겨주시니 이보다 든든ㄹ한 버팀목을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 
 
교수는 행정가로서보다는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정년을 맞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선생님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년을 맞이하는 셈이다. 학과로 돌아오셔서도 쉬지 않고 무슨 일인가를 계획하시는 분이다. 

<동리, 목월문학관>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힘든 일을 앞장서서 하시겠노라고 문학관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아 마침내 선사시켰다. 이제 건립만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올해로 정년을 하시고 교단을 떠나는 선생님께서는 <동리, 목월 문학관>이 완공될 때까지 그 일에만 더욱 매진할 것이다. 
       
이 일이 선생님께서 미리 계획하시는 마지막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본다. 선생님은 불사조처럼 그 누군가가 해야 할일을 맡아 스스로 고생을 감수할, 또 다른 일을 계획하실 것이리라. 그리고 정년을 하신 후에도 지역사회에 남으셔서 나의, 아니 우리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아주시리라.
  
그동안 많은 업적을 남기셨고, 오늘도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미리 계획하고 앞장서 실천하시고 계시는 선생님,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연구실 앞 복도에서는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별 일 없느냐’면서, 내 연구실로 불쑥 들어서시는 선생님. 생각만 하여도 추운 겨울 난로를 지핀 듯 마음 저편까지 훈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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