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이고, 정 깊은 사람을 만났네 (32)
  제13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4

열정적이고, 정 깊은 사람을 만났네

김주현
<경북대학교 교수>
벌써 정년퇴임이라니. 
아직 한참은 더 남은 것 같은데......
내가 선생님의 정년퇴임 소식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뵌 지는 8년 가량되었다. 그때 벌써 그는 육순에 가까운 나이셨던가보다. 내게는 늘 젊고 활달하게 사시는 분으로 기억되었기에 정년퇴임이라는 이사는 매정한 말로만 들렸다. 그리고 세월의 무정함을 느꼈다. 

어쩌면 내가 가까이서 뵙다가 최근 4년은 자주 뵙지 못해서 그만 세월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벌써 연세가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세월이라는 것은 정말 모르는 순간에도 무던히 흘러갔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원을 마치고 경주대학교에 임용될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였고, 그는 학교를 책임지고 경영하는 총장이었다. 그렇게 공적인 관계로 만났던 것이다. 처음 면접에서 뵈었을 때 굉장히 자상하게 대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임용이 되고서도 사적으로는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신임 교수와 총장 사이에 대면할 이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물론 교수연수회나 전체 교수회의에서 몇 번 볼 수 있었다. 다만 멀리서 바라볼 때, 굉장히 의욕이 넘치고 합리적인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위 선생님들의 평가도 한결같았다. 

총장으로 부임한 이래 의욕적으로 학교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었고, 또한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을 지냈다. 학교는 대학평가의 준비로 바빴고, 학내외의 상황은 점점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의 생활에도 벅찼다. 

내가 선생님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학교평가 때문이었다. 학교에 부임한 지 1년여가 되었을 때이던가. 나는 서울에 출장을 댜너 올 일이 생겼다., 나는 우연히(?) 총장이었던 그와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벽 일찍이 집을 나와 서울행 열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올라가면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 

도착하고 나서도 바쁜 일정으로 다녔다. 사람들도 만나고, 필요한 정보도 얻고..... 학교의 미래가 걸린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매사에 팔을 걷어붙이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의 모습을 가까이 뵐 수 있었다. 나에게는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저녁까지 발로 뛰어다니다가 같이 하행선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 4시간 반 여의 시간 동안 열차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 김주현 교수 [출처 ; 경북대 홈페이지]    
선생님의 사적인 과거 이야기에서부터 대학 생활과 대학원 생활, 그리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있었던 일, 현재 학교의 경영자로 있으면서 겪고 있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분주하게 전개되었다.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정만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4시간여의 시간이 어느 사이에 간지도 몰랐다. 

그리고 열차에 내리고서도 아쉬움이 있었기에 다시 법원 앞으로 가서 그가 자주 찾는다고 하는 음식점으로 갔다. 거기에서 식사를 같이 하면서 한참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에 선생님의 친구들도 들어왔다. 그들이 선생님을 알아보고 우리 자리로 오면 어김없이 나를 소개해주시고 진지한 대화를 하셨다. 나는 그날 그의 순수함과 진지함, 그리고 지치지 않는 열정을 보았다. 정말 무소 같은 괴력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후 선생님은 총장직을 마치고 내가 있던 문예창작학과로 돌아왔다. 우리는 전공이 비슷하기에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학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학교는 새로운 총장 아래 계속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이전보다 자주 그를 뵐 수 있었는데,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2000년 11월경으로 기억한다. 대뜸 <동리, 목월기념관>을 경주에 건립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동리의 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그런데 경주에 와서 살면서 내개 책으로만 보아온 동리는 단지 허상 또는 표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경주에서 오롯이 김동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동리의 자료가 모두 집적된 박물관 성격의 기념관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좋겠다고 했다. 이미 그는 기념관과 관련해서 의견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나와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나는 동리와 목월의 기념관을 따로 하고, 먼저 동리의 기념관부터 건립하고, 상황을 보아가며 목월의 기념관을 짓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고, 선생님은 예산지원과 사업의 수월성을 내세워 같이하자는 견해였다. 그러나 건설이 된다면 그것이 굳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는 기념관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와 추진력으로 곧바로 작업의 실천에 들어갔다. 12월 1일 13명의 추진위원회가 결성이 되었다. 그는 위원장을, 나는 간사를 맡게 되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두 달만인 2001년 2월 3일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수백 명이 모여 <동리, 목월기념관> 건립사업회 발기인 대회를 열수 있었다. 거기에는 <동리기념사업회>나 <목월회>, 그리고 문단과 경주시의 협조, 그리고 추진위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을 진두에서 지휘하며, 모든 일을 확실히 진척시킨 그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동리, 목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이 되었고, 필요한 작업들을 착수해나갔다. 그것은 선생님이 경주를 위해, 그리고 일생을 바쳐온 한국의 현대문학을 위해 마지막으로 하나의 보람된 일을 해보고 싶다고 뛰어든 일이었다. 

경주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었다. 나 역시 중간 중간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일의 당위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또한 나를 믿고 맡겼기에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아마 2월 행사를 정신없이 준비하던 1월 중순경 이었나보다. 한번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경북대에 있는 권 교수를 만났는데, 김 교수를 경대 국문과로 데려가기로 했다고 해요.”

권 교수님은 당시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시를 전공하신 선생님으로 인문대학장으로봉직하고 있었다. 두 분은 동문수학을 한 막역지간이라는 말을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이전에 내가 학교를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잠깐 언급을 한 적은 있었지만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머뭇거렸다. 

“.......”

“내 그래 얘기했지. 김 교수를 절대로 데려갈 수 없다고, 데려갈 생각은 꿈에도 말라고.”

그는 소식 겸 섭섭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나로서는 너무나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정말 따스하고 정 깊은 분이었다. 

나는 그 후 대구로 이사를 와서 기념관 건립사업도 제대로 돕지 못하고, 또한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도 왕성한 의욕으로 기념관 일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기념관 사업은 그 후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선생님을 비롯한 임원진이 발 벗고 나서서 정부의 예산지원도 많았고, 일이 잘 추진되어 간다고 들었다. 

이제 이번 학기가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학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직도 할일이 많고, 또한 하셔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정년퇴임 이후 더욱 바빠지실 거라고. 이제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자유롭게 이룰 것이라고. 

아울러 앞으로도 이전처럼 매사에 더욱 열정적이고, 또한 건강과 활력이 넘쳐 기념관 일 말고도 보다 많은 일을 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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