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반자 (4)

아름다운 동반자

변종화

<전 국민카드 사장, 국민은행 감사>

50여년의 세월이 바쁘게 흘러갔다. 장 박사는 나와 경주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한 몇 안 되는 동기동창생 중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중학교 동창들이 경주중학교에 진학하는데 장 박사와 나는 경주가 아닌 대구에 있고 그것도 사범학교라는 특수 고등학교를 선택했는데, 그것만 해도 특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장 박사를 생각할 때면 제일 먼저 대구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할 때 함께 겪은 황당한(?) 사건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나는 입학시험 날짜가 다가오자 대구 삼촌댁에서 숙식을 하기로 작정하고 경주역으로 나가대구행 열차를 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열차 칸에서 장 박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장 박사는 대구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응시날짜와 기차시간에 맞추다보니 우연히도 같은 날짜 같은 시각에 같은 기차를 타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하고 같이 앉아 애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 박사가 시험기간 중 어디서 묵을 거냐고 물어왔고, 나는 삼촌집에 묵을 거라고 했더니, 자기는 사촌 집에 지낼 것이라고 하면서 오늘 이렇게 만난 김에 자기와 함께 동행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언뜻 생각하니 장 박사도 신세지는 처지인데, 나까지 얹혀서 신세를 져야 하는 부담감도 없지 않았으나 설마 장 박사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도 하긴 했고, 그것보다 낮선 도시에서 혼자서 가노라니 여러모로 불안하던 차에 잘됐구나 싶어 선뜻 동의하고 말았다.

이윽고 기차는 대구역에 멈추었고, 장 박사와 나는 장 박사 사촌 댁을 찾아가게 되었다. 장 박사 사촌댁은 지금은 중심가라 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대구시 변두리이던 지금의 수성교 못미쳐 대로변에 접해있는 동부교회 뒷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떤 허름한 대문 앞에서 “이 집이야.”하기에 얼른 안으로 쳐다보니 아주 왜소한 집 한 채가 보였고, 안으로 들어가서 알고 보니 방은 하나뿐이고, 이 단칸방에서 숙모님과 사촌들(아마도 4명이라 기억됨)이 숙모님의 삯바느질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아주 어려워보였는데, 우리까지 합하면 일곱 식구가 이 조그만 방에서 숙식을 해야 한다니 나로서는 여간 낭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 박사를 언뜻 쳐다보니 대충은 알고 있었던 듯 나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어찌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숙모님과 우리 또래의 사촌이 다가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며칠 간이니 같이 지내자고 하면서 합격이나 꼭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인자한 모습의 숙모님과 사촌의 진지한 권유도 있었고, 장 박사도 그러자고 했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그만 못이긴 척하고 눌러앉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나이가 어렸다 해도 정말로 염치없는 일이었기에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나는 장 박사와 가끔 만날 때마다 사촌들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때를 같이 회상하기도 했는데, 장 박사도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어이없어 하면서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고 자책하고는 서로 멋쩍게 웃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의 숙모님과 사촌들은 비록 생활은 어려웠지만, 마음이 넉넉한 분들이었고, 우리에게 정말 고마운 분들이었다.

어쨌든 그 날은 그럭저럭 지나고 그 이튿날 장 박사와 나는 수험표를 받으러 대명동에 있는 대구사범학교로 갔다. 낮선 대구사범 교정에 들어선 우리 두 사람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도 되기 전에 벌써 운동장을 메운 인파는 아무리 특차시험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응시생이 몰려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 50년대의 대구사범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이다)

경주서 조용히 있을 걸 괜히 촐랑거리다가 망신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하룻밤이 지나고 그 이튿날 우리는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험을 마치고 나닌 홀가분한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두 사람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시간이 갈수록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그날 밤은 서로 몸을 뒤척이면서 잠을 설치고 있었는데, 새벽녘이 되자 창호지가 조금 밝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종소리가 그날따라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으니, 바로 동부교회 새벽종소리였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몸을 툭툭 쳤고, 서로 얼굴을 보고 끄덕이면서 옷을 주섬주섬 거두어 입고는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면서 <동부교회>문을 찾아들어갔다.

새벽인데도 벌써 많은 교인들이 나와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누구한테 들킬세라 그 교인들 틈새에 끼어 조용히 앉았고, 그리고는 두 손을 모으고 이번 입학시험에 꼭 합격시켜주십사 하고 몇 번이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고, 이 새벽기도는 합격자 발표일까지 매일 계속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는 가끔 교회를 나가긴 했지만, 중학교에 들어와서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는데,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급했기에 그런 발상을 하였는가 하고 혼자서 웃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이후 그렇게 절실한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아무튼 정성껏 드린 새벽기도 효험이 있었는지 그 어렵다던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그것도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합격하는 행ㅎ운이 있어 더욱 기뻤다. 이날의 대구사범 합격은 우리가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 자신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두 사람이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 박사와 나는 사범학교에 나란히 입학했다. 우리는 극소수의 고등학생만 체험하는 사범학교란 특수한 교육환경 속에서 3년 과정을 같이 했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함께 받고 임지로 각각 떠나면서 헤어졌다.

그리고 10여년이 조금 지날 즈음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던 내가 대구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장 박사가 함재비가 되어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는 사는 곳이 다르고 서로 가는 길이 달라서인지 너무 바쁜 탓이었는지. 가끔씩 만나기는 했지만 멀리서 서로 안부를 듣곤 하면서 어쩌다보니 또 40여년이 흘렀다.

지난 9월 거의 50년 만에 서울에선 처음으로 대구사범 전국 동기동창 모임이 있었는데, 장 박사도 나도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지난간 세월을 아쉽게 회상하면서 한밤을 지새운 일이 있었다.

나는 이미 34년간의 긴 직장생활을 은퇴한지 여러 해 되었는데, 장 박사도 얼마 안 있어 학교에서 퇴임한다고 한다. 장 박사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새롭고 긴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새로운 여정에서도 장 박사와 나는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던 기차칸의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하여 이어지는 시련과 행운의 남다른 추억을 서로 나뉘어 간직한 ‘아름다운 동반자’로서 당시 대구사범학교 교훈같이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되기’를 또 한 번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