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익 박사님과의 인연 (25)
  제12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3

장윤익 박사님과의 인연

신규호
<시인, 성결대학교 교수>

세월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던가. 어느덧 장  사님께서 정년을 맞아 은퇴하시게 되었다니, 실로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내가 장 박사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된 것이 1980년대 초였으니, 그동안 대략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나보다. 나와 함께 박목월 시인의 문하생이었던 대구 경북대학교 출신인 고 전재수 시인의 집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는데, 장 박사님과 전재수 시인은 동향으로 선후배사이였다. 

그 후, 문단관계로 해서 종종 만나 뵙다가, 박사님과 내가 각별히 가깝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83년 정초에 문단의 중진시인이며 월간 <시문학>지 발행인인 문덕수 선생 댁에서의 만남으로, 그날 서울 신림동의 장 박사님 댁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대학원을 수료한 나는 그때 아직 대학의 강의 시간을 얻지 못해 초조해있었는데, 그런 나에게 대학 강의를 맡겨주신 분이 바로 장 박사님이시다. 

현재 성결대학교의 전신인 성결교신학교의 재단이사셨던 장 박사님이 그 학교에서 자신이 맡으신 강의시간을 나에게 양보해주셔서 4년제 대학의 학력을 인정받는 각종 학교인 신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듬해인 1984년 초엽에는 망설이고 있던 나에게 용기를 주셔서 성결교 신학교의 전임으로 부임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 협조해주셨다. 

당시에 내가 망설였던 이유는 성결교신학교가 아직 정규대학이 아닌 각종학교였기 때문이었는데, 앞으로 정규 4년제 대학으로 개편될 것이니 용기를 내서 결단하라고 촉구하셔서 결국 고등학교를 사직하고 신학교의 전임교수가 된 것이다. 
 
▲ 전 성결대 교수, 시인 신규호 [출처 ; 문학아카데미TV]

장 박사님 말씀대로 몇 년 후에 성결대학교로 개편되었고, 국문학과도 개설되어 소망한대로 나는 비로소 정식 대학교수로 학문을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도 장 박사님과 동감으로, 같은 해 같은 달에 정년을 맡게  되어 정든 캠퍼스를 떠나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를 교수로 만들어주신 분이 장 박사님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관계일과 박사 논문의 주제를 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 박사님과 만남을 지속해오면서 자연히 그 분의 면면을 보다 깊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장 박사님은 나에게만 그런 전폭적인 도움을 주신 분이 아니었다. 어느 누가 도움을 청해도 도와줄만한 일이면 기꺼이 앞장서서 도와주시고 끝까지 일이 성사되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걸 보면서 그 분의 대인다운 풍모에 감탄한바 컸다. 

인천대학교와 경주대학교의 총장직을 맡으셨던 것도 그 분의 그런 대인다움과 능력을 갖춘 리더십 때문이리라고 생각한다. 인천대학교 총장시절 한때 어려운 고비가 있었지만, 본인에게 돌아오는 손해가 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면서 그 고비를 극복해나가시는 모습은 가히 대인의 풍모 그대로였다. 

경주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셔서도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하시고 학교를 한 단계 성숙하도록 힘쓰셨으면서도 임기를 마친 후 결연히 총장직을 사임하고 평교수로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박사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수년 전부터는 고향의 문화발전을 위하여 경주 출신 문인인 작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의 기념관 건립을 도맡아 동분서주 추진하는 등 초인의 활동을 통해 그 일을 성사시키는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으니, 장 박사님이야말로 타고난 초인적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은퇴하시지만, 남은 여생을 후학들의 지도와 문학평론가로서 더욱 큰 업적을 남기기 위해 일하시리라 믿으며, 끝으로 박사님께 건강과 행운이 내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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