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장 총장
권기호
<시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오래전 경북 신령면에 있는 거조암에 들른 일이 있다. 대웅전은 신라 때 조성된 건축양식으로 후에 몇 번이나 증축하였지만 대체로 신라의 건축 원형을 지니고 있어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돌을 주지스님이 신통으로 밤새 깎아 오백 나한을 조성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 조성된 모습의 표정들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처음 그곳에 들러 한 분 한 분 경건한 마음으로 유심히 보고 가는 가운데, 한곳에 이르러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이를 내어 놓고 활짝 웃는 모습이 어딘가 낮 익은 모습이었다. 누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불현듯 장윤익 총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짙은 눈썹을 하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또 이해하고 있다는 듯, 한쪽 모퉁이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내가 장 총장이 오백 나한과 같이 신통이 있다든가 도의 경지가 그만큼 높다든가 그런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좌석에서 장 총장과 세상사의 일이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웃음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그런 표정의 넉넉함과 지혜 같은 것을 얼핏얼핏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웃음 같은 것이 상대에게 신뢰를 주고 인간다움을 느끼게 해 많은 지인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 있도록 하는 힘이 아닌가. 나는 가끔 생각해보는 것이다.
장윤익 총장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의리의 사나이’라는 낱말이다. 그의 교우관계나 처신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인연을 두고 있었던 사람에 대해 변치 않는 인간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상대에 대해 무조건적인 맹복아 아니라 언제나 상대를 위해주는 고언과 협조도 아끼지 않으면서 끝까지 함께 한다는 점이 그런 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게 득이 되면 원만하지만 피해가 된다 싶으면 여지없이 모르는 체 하는 것이 인간사인데, 장 총장은 상대가 어렵더라도 절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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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기호 시인 [출처 ; 대구재향경우회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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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때로 그것 때문에 본인 자신 많은 피해를 입어도 절대로 피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다. 그의 그런 심성을 용케도 경영자들이 잘 알아보고 대학총장이라는 중요 직책을 두 곳에서나 맡겼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불편부당한 행정적 능력과 조화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대학원을 마치고 마산 경남대학과 진주교육대학, 그리고 경북대 시간강사로 떠돌아다닐 무렵 장윤익 총장은 야간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경북대 대학원에 들어와 김춘수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문학평론>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고, 나와 같이 <에스프리>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내가 진주교육대학 전임으로 결정되어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경북대에 자리가 있어 경대로 오게 되었다. 그 진주교육대학 자리에 장 총장이 이력서를 내어 겨의 다 되어 갔는데, 일이 어긋나 뜻대로 안되자 얼마 있다 서울 명지여고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큰물에서 놀아야겠다는 뜻이었을까?
그가 갓 서울에 안주할 무렵 어느 날 나를 만나러 대구에 내려온 일이 있다. 그 당시 대구 문인들이 자주 가던 막걸리 집으로 <쉬어 가는 집>란 곳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우리들은 상봉을 했던 것이다.
그의 부탁은 시인 문덕수 씨의 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 내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가 대구 경북문협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문협 이사장 선거를 앞두고 물밑경쟁이 치열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대구 촌사람인데, 서울에 올라가 부탁할 사람이 오죽 없으면 평소 부탁을 잘하지 않는 장 총장이 나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겠나 싶어 흔쾌히 약속하였다.
물론 당시 문덕수 시인의 처지로 보아서는 그 선거가 아주 불리한 선거였다. 그런데도 문단 발표지면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장 총장은 그쪽에 서서 분투하였던 것이다.
사실 문인사회처럼 이해관계에 민감한 집단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무릅쓰고 그때나 지금이나 문덕수 시인과 40년 이상의 친분을 쌓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장 총장의 인간됨과 결부된다고 할수 있다.
장 총장과 나의 교우관계도 어언 반세기에 접어들고 있다. 그가 나한테 어떤 부탁의 일이나 내가 협조를 구할 일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내 자신 그의 부탁을 시원하게 해결해준 적은 적지만, 내가 부탁하는 것에 대해 그는 최대한 성의를 다해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점에서 나는 항상 그를 고맙게 여기고 있다. 패기만만하고 자신에 차 있던 그도 이제 어언 정년이 다 되었는가 보다.
이 가을 장 총장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다시 <에스프리> 시대가 문득 그리워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