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우신 엄격함
박세현
<시인,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 교수>
내가 장윤익 교수님을 만난 것은 1980년 봄학기 <비평론>교실에서다.
그때 나를 비롯하여 관동대학에 재학하며 문학을 하겠다는 문학도들은 이상한 갈급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문학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과 문학의 본원적 비의를 스스로 깨치기 어려운 갈증들이 우리가 겪어야 했던 갈급증의 진원이었다. 우리 식으로 풀어 말하자면 맘 놓고 비빌 언덕이 궁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때에 장 교수님의 등장은 지방대학 문청들에게 더없는 기쁨이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는 현역 평론가의 문학적 복음을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나 당시 국어교육과에 재학 중이었던 문학도들이 새로운 평론가 교수에게 걸었던 기대를 감상적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장 교수님이 가지신 가장 큰 덕목은 특유의 친화력과 포용성이다. 변방에서 창작 공부를 깨우쳐가던 우리들은 문학에 관한한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편향적이었다.
창작의 방향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문학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일탈과 방종과 모종의 객기만이 문학도가 이수해야 하는 필수과목으로 여겼던 무리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촌스럽고 덜 떨어진 군더더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장 교수님이 교수로서 평론가로서 우리에게 던져준 은혜는 우리가 가진 문학의 편향성과 이분법들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너그러움과 폭넓은 안목을 키워주신 것이다.
장 교수님은 특히 학생들에게 너그럽고 관대하셨다. 주머니에 막걸리 반 되 값밖에 없는 학생들이 교수님께 술을 사겠다고 하면 교수님은 언제나 사양하며 배로 갚아주셨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언어라는 것이 질서를 구비한 것도 아니고 어떤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설왕설래를 끝까지 경청해주셨다는 것은 여태껏 사라지지 않는 고마움이다.
한번은 <섬> 동인 패거리들이 교수님의 숙소에 쳐들어가(?)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교수님은 그래도 사양하지 않으시고 한심한(?) 우리들을 가납해주셨다. 마침 건넌방에는 국어학 분야를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투숙하고 계셨는데, 그 밤 교수님은 우리들의 소란 덕분에 잠패롱을 하셨다.
술과 잠이 덜 깬 눈으로 강의실에 들어서니 공교롭게 지난밤 일단의 술꾼들에게 잠을 망친 교수님이 담당하는 <국어학> 강의시간이었다. 그날 밤 장 교수님의 숙소에 있었던 시인과소설가 연습생들은 하나씩 지적되어 강의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는데,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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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현 시인 [출처 ; 훅커전 네이버 블로그]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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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룸필드을 잔디 깎는 기계정도로 알고 있는 우리들이 ‘변형생성문법’에 대해 어찌 알겠는가. 무지하고 서출기만 했던 어설픈 객들로 인해 잠 못 드셨을 소쉬르 전공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용서하십시오.
장 교수님이 부임하시면서 천명하셨듯이, 내곡동 캠퍼스는 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룩하는 싹을 튀워 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실은 하나씩 통쾌한 결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교수님 지근에서 교수님을 괴롭혔던 아마추어 글쟁이들이 <한국일보>, <심상>, <창작과 비평>, <문학정신>, <문예중앙> 등의, 지면을 통해 화려하게 문인으로 등장하게 된다.
모두 <섬> 동인에 드나들던 친구들이다. 이런 사건은 관동대학을 물론이고, 다른 지방대학 역사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전무후무한 장엄한 일이다. 아마 이런 결실은 지금도 모교를 지키고 계신 시인 엄창섭 교수님과 장 교수님에게 힘입은 바 크다.
따져보니 장 교수님을 만난 것이 벌써 24년째다. 그 세월동안 장 교수님은 인천 쪽으로 학교를 옯기셨고, 인천대학교와 경주대학교의 총장직을 역임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 강릉시 내곡동에서 교슈님을 만난 우리에게 장 총장님은 여전히 그냥 선생님일 뿐이다. 칭얼댈 수 있는 가부장적 기둥일 뿐이다.
한때, 장 교수님은 마포에 있었던 조그만 출판사인 인문당에 자주 들르셨다. 우리는 그 시절을 일러 마포시절이라 명명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시절은 장 교수님의 인생역정에 있어 가장 힘든 시절이라고 여겨진다. 총장직과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낭인시절을 보내던 그 시절이다. 그 힘든 시절을 버티면서 한 번도 흐트러지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아마도 교수님은 그 시절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통해 인간과 삶을 되새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마포에 들어 재야에 나앉은 교수님을 자주 뵈었었다. 동틀 때가 가장 어둡다고,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시던 교수님의 꿋꿋한 모습은 지금도 내게 늘 힘이 되어준다. 나는 그런 교수님이 고맙다.
한번은 마포에 들러 교수님과 이것저것 말씀을 나누다가 목욕을 가게 되었다. 교수님에 내게 당신의 등을 맡기셨다. 나는 교수님의 등을 밀어드렸다. 나는 교수님의 은혜만 입고 무엇 하나 제대로 돌려드린 게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마포에 있는 사우나에서 은사님의 등을 밀어드렸던 것이 내가 했던 유일한 은혜갚음이 아니었을까, 일말의 죄책감이 밀려와 적어 놓는다.
정년이나 은퇴라는 용어는 옳지 않지만, 저는 여전히 생맥주와 오징어가 있는 목로에서 선생님과 마주앉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제게 너그러우셨던 만큼 저도 누구에겐가 너그러운 엄격함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게 교수나 총장이 아닌 나의 선생님께서 미욱한 제자에게 돌려주신 은혜로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