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엘파소 안식년 (27화)
  제5장 중견 사제로서의 활동의 다양화

부인이 생겼다면서요

<나는 부인을 갖고 싶다>
어느 삼복더위에 
친구에게 농담으로 한 말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말 그렇게 되었답니다
신부가 부인이 생겼다는 소문에
신자들이 눈에 쌍날을 세우고
우루르 몰려와 따졌겠지요

신부님 
부인이 생겼다면서요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안방에 들어가 보시오
우루르 몰려들어 가더니

신부님은 장난이 너무 심하셔
침대 위에 죽(竹) 부인이

엘파소 소개

나는 화산동 성당에서 3년을 살다가 1994년 안식년을 신청해서 두 번째로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안식년 기간은 1년으로 조건은 어학연수와 휴식이었다. 

신부는 10년이 넘으면 안식년을 신청할 수 있다. 교회법에도 교구지침에도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허락한다. 내가 안식년을 할 때에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교구청과의 관계가 좀 복잡한 일도 있었지만 결과는 내 뜻대로 잘 이루어졌다. 

엘파소는 텍사스주 서남쪽 멕시코와 국경지대로서 작은 군사도시였다. 교민들은 주로 군인이 많았다. 그리고 멕시코와 경계지역이기 때문에 멕시코 사람들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 교민도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모래와 바람이 많은 사막도시였다. 차를 타고 1~2시간 달려가야 산의 숲을 볼 수 있었다. 낮에는 40도가 넘는 더위지만 습도가 낮기 때문에 그늘에만 들어가면 견딜만 했다. 

나는 이곳 한인공동체에서 주일날 미사를 봉헌해주고 그곳 공동체에서 마련해준 사제관과 자동차를 이용하였고, 식사는 신자들이 당번제로 도와주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그때 수고해주신 어머니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 선임자로 사목했던 마산교구 사바 신부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내가 거주할 수 있도록 많이 배려해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덕택으로 나는 오전에 이곳 주립대학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했다. 이때에 멕시코 중국 남미 학생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좋은 기회였다. 특별히 어학선생님은 내가 나이가 많다고 성적이 좀 부진했지만 넘어가 주었다. 이렇게 열심히 배워봤지만 나는 이쪽에는 소질이 없나보다. 지금도 영어소통이 신통치 않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하루가 단순했지만 지금 뒤돌아보니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 안식년 때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 백사장에서

집 가까운 곳에 동네 골프장이 있어서 오후에는 그곳에서 살았다. 일 년에 천불만 내면 회원으로 매일 골프를 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동네 친구들과도 우정을 쌓는 시간들이었다. 

사제관 옆집에는 6.25참전 용사가 살았는데,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한국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으며 형님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 집 뒤뜰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가끔씩 저녁 초대 때 수영장 옆에서 직접 구워 만든 독일식 소시지 파티는 정말 일품이었다. 그때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을 거시다. 주여, 그에게 안식을 주소서. 아멘.
 
남미아르헨티나 2차 방문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있던 박종상 선배가 교통사고를 당해 미사를 드려달라고 소식이 왔다. 이곳 공동체에 양해를 구하고 2주간 그곳에 가서 생활하면서 이과수폭포를 두 번째 구경하는 횡재를 맛보았다. 

아르헨티나 한인교회는 큰 공동체였다. 2주 동안 머물면서 신자들의 배려로 좋은 구경을 했다. 

이곳 교민들은 처음에 농업이민으로 왔다가 직업을 바꾸어 보따리 직물상으로 출발해서 지금은 이곳 시장에서 직물업계를 잡고 있다. 특히 의류패션은 한국거리가 따로 있을 만큼 선두주자로 우뚝 서 있었다. 교민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성공하여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교민들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해서 어디를 가나 살아남는 일등 국민이다. 대만민국 반세!
 
이산가족 상봉
 
앞서 애틀랜타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있을 때 미주 성령묵상회 팀과 아르헨티나에 간 일을 소개한 바 있다. 이때에 있었던 보람된 사건 하나를 적어본다.     

묵상회 마지막날 상담 때 한 여인과의 사연이다. 내용인즉 그녀는 10년 전에 미국 애틀랜타로 이민을 와서 열심히 살았는데, 일에 바쁘다보니 사춘기 때 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아들이 가출을 하고 말았단다. 그 후 다시 아르헨티나로 삶의 자리를 옯기면서 가출한 아들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10년이 흘러 자리도 잡히고 지금은 부족함이 없지만 아들 문제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눈물어린 하소연을 하였다. 

이국에까지 와서 가족이별이라니 그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사연을 듣고 나는 애틀란타에 가면 한번 찾아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아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참고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한동안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몇 달 후에 아르헨티나에서 전화가 왔다. 궁굼해서 올리는 전화라고 했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바로 애틀란타 교민소식지와 한미방송 그리고 성당주보와 애틀란타 개신교에 협조요청을 했다. 

소식이 나간 뒤 약 2개월 만에 아들한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바로 부모한테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과 함께 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전해주었다. 이렇게 되어 헤어진 지 10년 만에 아들 상봉이 이루어졌다. 

내가 두 번째로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아들 상봉을 해주었다는 일로 그 가정에 초청을 받아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 후로 나도 잊고 살았는데, 자서전을 쓰다 보니 문득 기억이 떠올라 소개해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가정을 축복해주옵소서. 아멘. 

 
  1980년 전주 화산동 성당 부임 (26화)
  김제 신풍성당 부임 (28화)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