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글라라 수녀원 상주신부 부임 (33화)
  제6장 가톨릭신앙의 지역공동체에서

우전성당은 내 나이 50대 후반 사제생활 가장 예쁘고 다양한 사목활동이었다. 이곳 사목생활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곳에서 제일 많은 일을 감당했고, 내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런 속에서도 피곤이란 말은 입에 담아보지도 않았다. 하루가 행복이고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신자들을 만난다. 내 자랑 같아서 쑥스러운 말이지만 신부님 그때 강론이 좋아서 우전성당에 자주 왔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사실은 나도 이때 내 사제생활에 정열을 쏟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축복의 시간이었다. 사제생활 말기에 좋은 추억을 갖고 살았던 우전성당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성대에 무리가 와서 병원치료도 받았지만 사람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이런 중에서도 건강을 챙기기 위해 매일 삼천천 아침조깅, 겨울엔 무주스키장도 자주 다녔다.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오고가며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다. 이런 모습을 신자들도 좋아했고 행복했다. 우전성당 만세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또 다시 그런 시절은 없겠지요. 주님 제자로 선택해 주심에 감사 또 감사를 드립니다. 
 
▲ 우전성당 사제서품 25주년 동생부부 봉헌

2002년 익산 성글라라 수녀원 상주신부 부임

우전성당에서 4년 임기가 되던 해 처음으로 신상문제로 주교님을 찾아갔다. 이번 인사 때는 일감이 적은 시골이나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며칠 지나서 총대리 당시 김병운 신부님이 찾아오셨다. 익산에 있는 성글라라 봉쇄수녀원 상주신부로 갈수 있겠느냐고 제안을 하셨다. 뜻밖이었다. 수녀원이라는 말에 좀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도 사목생활에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미사는 아침 6시였는데 은혜로운 시간들이었다. 하루가 주님께 봉헌하는 일로 시작되고 수녀님들은 하루가 기도와 노동으로 꽉 짜여 있었다. 미사 때 본당에서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에 많은 체험을 한 은혜로운 곳이었다. 

살림 장만

이곳에 오기 전 상주 신부님들은 수녀원 출입구 한쪽 사제관에 살았다. 규모가 협소해 식당과 주방이 없었다. 그래서 전임 신부들은 외부 신자들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 말하자면 하숙생활을 한 것이다. 

나는 이런 조건을 모르고 이곳에 왔다. 나는 사제관 작은 방 하나를 식당으로 만들고 주방원은 수녀원 손님방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주방 새살림을 차리느라 일주일 동안 시내를 오가며 살림을 물어 날랐다. ‘솥단지 밑에 딸리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주방원으로 수고했던 고종사촌 누이 전연주(비리짓다)에게도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여유로운 취미생활

이곳은 시간여유가 있었고 조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사제관 옆에 작은 공터가 있어서 텃밭을 일구어 보았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재미가 쏠쏠했다. 텃밭에 씨앗을 넣고 기다리는 마음, 옆에는 닭장을 지어 닭을 키웠고, 욕심이 생겨 토끼집도 손수 만들어 토끼도 키웠다. 

아침저녁으로 모이를 주는 재미가 괜찮았다. 얼마 지나서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 이웃집에서 예쁜 강아지로 갖다 주고 할아버지가 벌통도 놓아주고 영락없이 시골집 풍경 그대로였다. 

처음으로 이웃집 할아버지와 고사리도 꺾으러 갔다. 버섯을 따러 다니는 산행도 재미가 쏠쏠했다. 바로 이웃에는 탁 트인 교구농장이 있었고, 그 앞에는 파란 보리밭, 조금 나가면 천변갈대 산책길이 있었는데, 서녘에 지평선 노을이 환상적이었다. 

나는 매일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정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시간이 나면 금마에 있는 미륵산도 자주 올랐다. 

덕분에 해외여행

서울에 있는 프란치스코 소속 지도신부님이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해주셨다. 1년에 한 번씩은 연례피정을 1주일간 했다. 이때 나는 자동으로 휴가가 된다. 동구라파에 가고 싶었지만 날짜가 모자라 동남아 몇 곳에 다녀왔다. 주교님 피정 때는 호주를 여행했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1박 2일로 어청도도 다녀왔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나의 수녀원 생활을 한권의 책으로 2002년 <당신은 복 받을 거야>라는 수필집을 냈다. 

태풍 매미

매미 태풍으로 수녀원 담이 넘어가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뿌리채 뽑혔다. 사제관 지붕 기와도 몇 장이 날아갔다. 이웃성당 봉사자들이 와서 도와주었지만 쉽지 않았다. 수녀들은 수녀원 안팎의 대청소로 바삐 움직였다. 나는 한나절이나 지붕이 날아간 닭장을 수리하느라 바빴다. 이웃집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도 날려버린 무서운 바람이었다. 

당시 월드컵 축구가 전주 경기장에서 있었는데, 배가 내려 비옷을 입고 추위에 떨며 관람하던 생각이 난다. 경기한 나라는 어디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야채바구니에 담긴 건강식단

이곳은 내가 사람들로부터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고 살았던 고마운 곳이었다. 말 그대로 봉쇄수녀원이었기 때문이다. 견디기 힘들어 하는 소름에 방해받지 않고 살았던 행복한 생활이었다. 가끔씩 작은 바구니에 수녀님들이 직접 가꾼 신선한 야채를 보내주셔서 건강한 밥상이 즐거웠다. 

수녀님들과 함께 했던 생활이 행복했다고 이 지면을 빌어서 말씀드립니다. 고마웠어요,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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