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때문에
신부는 여러 본당을 옮겨 다니게 마련이다. 신부 생활 중 10곳의 본당을 옮겨 다닌다. 이렇다 보니 신부는 떠돌아다니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한 본당에서 4년 정도 있다가 떠나게 되는데,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인간적인 정이 들게 마련이다.
특히 말동무가 없는 할머니들에게는 신부가 대단한 존재이다. 성당에서 주일미사와 매일 미사 때 만나게 되고, 미사 후 말 한마디 붙여주고 손 한번이라도 잡아주면 그렇게 좋아 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처음 성당에 부임해 가면 가장 먼저 정을 주는 사람들이 할머니들이시다. 그리고 떠날 때 섭섭해 하시는 분들도 할머니들이시다.
어느 본당에 취임해서 경험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90년 4월경 교포사목을 마치고 부임한 곳이 전주 화산동 성당이었다. 이 성당은 내가 부임하기 4ㄱ개월 전에 조립식으로 예쁘게 지은 성당이었다.
그런데 초대 신부가 4개월 만에 교구청으로 가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그곳에 ‘땜장이’로 가게 된 것이었다. 신자들은 초대 신부와 막 정이 들어 재미있게 지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인사발령을 받고 떠난다고 하니 허탈하고 섭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 안주시겠다고 박대하셨던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세월이 지나 그곳 본당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고별 강론을 마치고 떠나려고 하는데,
저쪽 담 끝에서 홀로 울고 계시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처음 부임하던 날, 성당 문 앞에서 한복을 깨끗이 차려 입은 할머니 한분을 만났다. 언뜻 보아 신자인 것 같아 “할머니, 성당에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시고는 “댁이 새로 온 신부요?” 하시는 것이었다. “예,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시더니 얼굴을 확 돌리시고는 가버리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당황도 되고 기분도 조금 이상했다. 가끔식 당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전임 신부보다 외모가 좀 딸리기는 하지만 다른 성당에서는 할머니들한테 인기가 좋았는데, 이곳에서는 벌써 첫 번째 소박을 맞은 것이었다.
그래서 부임 첫날 강론은 신경을 좀 써서 준비했다.
“내가 이 성당에 와서 할머님한테 소박을 맞았는데, 나도 알고 보면 정도 많고 가슴도 뜨거운 사람이랍니다.”라고 설득 아닌 농 섞인 인사를 하면서, 이제는 잘났으나 못났으나 내가 이 본당 신부이고 여러분은 저와 함께 살아갈 양떼들이라고 능청을 떨면서 나에게 정 좀 주십사 하고 애교 섞인 강론을 하였다. 그랬더니 신자들이 재미있다며 박수로 환영해주었다. 일단 부임 첫 강론은 성공한 것 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한 달 가량이 지났는데, 정 안주시겠다고 나를 박대하셨던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반가이 할머니를 맞아들였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빙긋이 웃으시며 “그놈의 정이 무엇인지....... 떠난 신부는 정 떼고 새로 온 신부한테 반해버렸어.” 하시며 아부성 사과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머님, 벌써 저는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시고 사이좋게 잘 지내봅시다.”하며 등을 어루만지고 위로해드렸다. 할머니는 그동안 여러 신부님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면서 이런 감정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부라면 무조건 사랑스러워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정성을 다 하시는 어르신임을 후에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담배 한 보루를 손에 쥐어주셨다. 내가 담배를 태우는 줄 알고 선물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후 할머니가 오셔서 “신부님, 담배 안 태운다며? 그 담배 내놓아!”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담배를 얼마 전 손님 신부에게 주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나는 엉겁결에 담배가게에 가서 다른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왔다고 둘러대 버렸다. 그랬다면 상관없다고 하시면서 신부님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으시더니, 점심 때 보신탕이나 먹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뒤로 할머니는 내가 보신탕을 좋아 하는 줄 알고 식당에 보신탕을 단골로 대주셨다. 지금 생각해봐도 개 한 마리는 신세진 것 같다.
정이 많으신 할머니는 미사 때 한가운데 제일 앞자리에만 앉으셨다. 다른 사람은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 할머니의 지정 좌석인 셈이었다. 할머니는 천식기가 있어서 겨울에는 기침을 자주 하셨고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세월이 지나 그곳 본당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고별 강론을 마치고 떠나려고 하는데, 저쪽 담 끝에서 홀로 울고 계시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할머니 곁에 가서 등을 한번 두드려 드리고 다음 신부에게 정 많이 주시면 빨리 잊을 수 있다고 위로해드렸다.
할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신부는 정들만 하면 떠난다는 할머니들의 말씀을 많이 들었으나, 오늘 할머니 앞에서 나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
“정 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 놈의 정이 무엇인지......”라고 한 말씀 하시면서 눈물을 훔치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정말 정이 많으시다. 정 때문에 울고 정 때문에 웃고, 그 놈의 정 때문에.........
할머니 만수무강 하소서.
그동안 저도 할머니 많이 좋아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