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값으로 이 한몸 잡히고
신부로서 부끄러운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저 합니다. 사나이가 술 한잔 못하는 것도 처세술에 결격 사유가 된다고 어느 책에서 보았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는 술을 일찍 배웠다. 양조장 집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을 먹고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하거나, 남에게 부담을 주는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다. 술버릇 하나는 제대로 배웠다고 자부한다.
신학생 때는 피가 끓는 젊음이 있었고, 학문에 대한 의욕과 사제를 향한 꿈으로 온몸을 불사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신학교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집에서 쉬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동기생들과도 5살 차이가 나서 어울리는데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같은 반에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입학한 사람도 있었고, 대학에서 편입한 사람과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사람, 나 같은 늦깎이 입학생도 5명 정도 있었다. 우리들은 자주 어울렸고, 작은 서클 활동도 함께 하고 있었다.
추석날 신학교에 남아 있던 동기생들에게 술 한잔 하자고 꾀어
모두들 호주머니를 털고 내 시계까지 벗어놓았지만 술값이 모자라
11시가 넘어서 개구멍으로 몰래 잠입해 학교로 무사히 돌아가
만약 사감 신부에게 들키는 날에는 최소한 1년 정학
어느 추석이었다. 학교에서 추석방학을 이틀 주었는데,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집에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학교에서 추석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집에 가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것이 쓸쓸하게 생각되었고, 학교에서 베풀어주는 잔치보다 밖으로 나가 술 한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우리 반의 나이 든 다섯 명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두가 학교에 남게 되었다. 내가 그때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밖에 나가 술 한잔 하자고 선동을 했고, 다섯 사람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뜻에 동의해주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광주로 나가 충장로를 어슬렁거리다가 어느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갔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술집에 가는 것이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고 다섯 명이나 술 한 잔 먹는다는데 별일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느긋하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안주도 푸짐하게 시키고 술도 마음 놓고 한잔씩 하다 보니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며, 지금 학교 생활의 고통이며, 교수 신부들 흉도 보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마시다가 9시가 넘어버렸다. 모두들 술이 취해 시간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나는 술을 먹자고 선동한 책임으로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어 술값을 계산해보니 생각보다 술값이 만만치 않았다. 모두들 호주머니를 털고 내 시계까지 벗어놓았지만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글쎄, 그놈들은 내가 술먹으러 나가자고 했을 때, 돈지갑이나 가지고 나올 것이지 모두들 나만 믿고 빈손으로 나왔던 것이었다.
시간은 쫓기고 돈은 모자라고, 큰 일이 난 것이다. 더구나 10시에 학교 정문이 닫히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죽을 지경이었다. 할수 없이 4명은 학교에 들여보내고 나는 그 집에 술값으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선동했으니 책임도 내가 지기로 했다. 4명이 학교로 돌아간 뒤 나는 술이 취해 그 집에서 2시간 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깨워서 일어나보니 한 놈이 돈을 가져왔는데, 시간은 11시가 넘어서였다. 학교에 일찍 들어간 놈들은 개구멍을 열어놓고 기다렸고, 우리들은 11시가 넘어서 개구멍으로 몰래 잠입해 학교로 무사히 돌아왔다. 만약 사감 신부에게 들키는 날에는 최소한 1년 정학정도는 각오해야만 했다. 그때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들키지 않아 무사했던 것이었다.
주님! 이럴 때 당신 이름을 팔아서 죄송합니다.
나는 사제생활 27년을 보냈고,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후회하지는 않지만 젊은 객기가 지나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내 삶의 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내 평생 술값으로 이 몸 잡힌 신세도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어쩐지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숨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금까지 술을 먹고 잠깐 술집에 잡혀 있었던 일은 있었지만, 술을 먹고 남에게 폐를 끼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술을 먹으면 오히려 더 긴장하는 습관이 있어서 집에까지 오기 때문이다. 술을 먹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술을 먹더라도 제 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타일러 줄 때가 있다, 젋었을 때 실수 안해 본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사람은 실수 하면서 성장하고, 성장하면서 철이 들어 제 갈길을 간다고 하였다. 부끄러운 일을 고백하고 나니 부끄럽기 보다는 나의 과거를 용서받은 것 같아 후련한 기분이 든다.
남자는 술을 한잔씩 할줄 알아야 한다. 신부도 술을 한잔씩 할줄 알아야 한다. 술이 없는 자리는 너무나 삭막하다. 그러나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 올바른 주법을 아는 사람은 술을 지배하는 호걸이란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술을 먹고 주정하는 사람은 술만도 못한 사람이다.
술값이 없으면 나한테 오라. 내가 술 한 잔 멋있게 사겠다.
양조장에 술이 떨어져도 우리 집의 술은 남아있다.
그리고 술집에 잡힌 신세가 되면 나에게 삐삐 쳐라. 번개같이 달려갈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