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이 무너지는 소리
자존심은 어른들에게만 있는가? 아니다. 철이 들 어린아이에게도 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에서 10분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우리집 동네를 거쳐야만 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1~6학년이 각각 한 반씩으로, 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학교였다. 선생님도 몇 안 되었고, 모두가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하루는 여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부임해오셨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학기 초인 3월 초경이라 기억된다. 교장선생님께서 여 선생님을 소개할 때는 바람이 무척 불었었다.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었다.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았고, 사법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모습이었으니 아마 20살 정도 되었을 것이다. 얼굴은 둥글고 양쪽 볼에는 주근깨가 조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자 선생님만 있던 학교에 여자 선생님이 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고, 면 소재지에서 화장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사람은 그 선생님이 처음이었다. 나는 어릴 때였지만 그 모습이 신기하였다. 천사가 내려온 줄로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어머니는 내 머리에 키를 뒤집어 씌우고 손에 바가지를 들려주시더니
옆방 선생님에게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침 짓는 선생님께 소금을 달라고...
이야기가 잠깐 바뀌지만 우리 집은 3칸 접 집으로 우리 식구가 사용하고 도 뒤 칸에 부엌딸린 방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어느날, 천사와 같은 여 선생님이 우리집에 오셨다. 알고 보니 우리집 뒷방에서 자취를 하시려고 어머니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운명의 만남인가!
학교에 갈 때 여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갔고, 선생님 도시락을 가져다 드리는 영광도 내게 있었다. 학생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고, 나에게는 최고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우리집에 막내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엔 4형제만 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어머니 한분뿐이었다. 이런 우리 집에 여자가 들어왔고, 그것도 천사 같은 우리 학교 유일의 여선생님이시고 보니 내게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나는 잠을 잘 때도 선생님과 손을 잡고 학교 가는 꿈을 꿀 정도였고, 방과 후 시간이 나면 선생님 방에 가서 심부름도 하고 이야기 친구도 해주었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 외의 여자를 만난 첫 순간이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런데 하루는 웃지 못할 비극이 벌어졌다. 어느 날 밤 내가 잠자리에서 오줌을 싸는 실례를 한 것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일을 어찌 할꼬. 나는 궁여지책으로 어머니가 아침 짓는 부엌에 가서 조심스럽게 옷을 말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를 눈치 챈 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자존심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긴장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내 머리에 키(쟁이)를 뒤집어 씌워주시고 내 손에 바가지 하나를 들려주시더니 옆방 선생님에게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거기에 무슨 의미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침 짓는 선생님께 소금을 달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약간 놀라시면서도 재미있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시다가, 부지깽이로 머리에 씉 키를 두드리며 “어젯밤 오줌 쌌구나?” 하면서 나를 놀리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귀신이었다. 내가 오줌 싼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정말 창피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냥 아무 곳에나 숨어버리고 싶었고, 도망가고 싶었다. 영문도 모르고, 순식간에 당하고 보니 자존심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어머니와 여 선생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여자들 앞에서 나는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약 선생님이 이 사실을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당장 오줌싸개로 ‘왕따’를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긴장된 등굣길이었다. 학교에 갔으나 하루 종일 기가 죽어 있었다. 다행히 학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살아난 것이었다.
선생님이 한없이 고마웠지만 그 이후로 어머니는 야속하기만 했고, 여선생님께는 가까이 갈 자신이 없어 선생님 방에 드나들던 일도 그만두었다. 더 이상 여선생님은 내게 멋쟁이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었다.
이 나이가 된 지금도 가끔씩 꿈속에서 그 장면을 연출할 때가 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 일을 경함한 뒤로 내 성격 변화에도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매사를 꼼꼼히 살피고 실수하지 않도록 세심히 살피는 편이 된 것이다. 자존심도 강해서 여간해서는 나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싫어한다.
아, 자존심이 깨졌던 순간이여! 지금은 그런 일 없으니 소문내지 마십시오.
나 지금은 오줌싸개 아니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