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했던 형제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장형은 전주공고에 다녔다. 당시로서는 고급 옷인 비로도 잠바를 입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는 멋쟁이로만 보였다.
방학 때 장형이 축음기를 사가지고 왔다. 그 속에서 나오는 노래가 신기했다. 우리 집 형제들은 당시 유행하던 여러 가지 노래를 들었다. 장형은 당시 유행하던 <비 내리는 호남선>이란 노래를 연습해서 동네 노래자랑에 나가기도 했다. 멋쟁이 장형의 연애편지를 이웃집 아가씨에게 배달사고 없이 전해준 일도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쫑그랭이 임에 분명하다.
여름이면 형들을 따라다니며 냇가에서 배터리 충전기로 고기를 잡았다. 한번은 고기약을 풀어 지서에 불려간 일도 있었다. 우리 형들은 좀 유별난 데가 있어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지뢰밭이었다. 내 바로 위 형은 나와 네 살 차이지만 유난히 나와 다툼이 많았으나 동생들하고 다툰 기억은 없다. 지금은 모두 잘 살고 있다.
별명 쫑그랭이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언제나 강아지처럼 어머니 치마폭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어머니의 부엌일을 많이 도와드렸다. 부엌을 드나들며 아궁이에 갈퀴나무를 부지깽이로 넣어주는 일이 재미있었다. 물론 지필 때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익어갔다. 그런 보상으로 누룽지는 항상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나무토막으로 치면 가운데토막인 셈이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내 위로 두 형제는 사춘기를 유별나게 지내면서 부모님 마음고생을 많이 시켜드렸다.
내 밑 동생들은 너무 어려 잔심부름을 시킬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중간에 끼어 있는 내가 어머니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는 심부름 시킬 일만 생기면 내 이름을 제일 먼저 부르셨다. 나는 어머님의 잔심부름에 한 번도 거역하거나 잔꾀를 부려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보고 우리 집 쫑그랭이라고 불러주었다. 쫑그랭이가 나의 첫 번째 별명이다. 전라도 말로 곁에 두고 언제나 편하게 부린다는 뜻이다.
봄이 되면 어머니와 씨앗봉지를 들고 텃밭을 들랑거리며 텃밭과 친해졌다. 진달래 피던 4월이면 산나물을 캐러 가던 일, 한 여름 밤 모깃불을 피워놓고 삼베 홑이불이 눅눅할 때까지 들려주시던 밤 하늘의 벼리 이야기들, 10월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겨울 이불을 준비하시던 일, 설날 대목이 되면 새 고무신과 옷가지를 장만하러 가던 시장 길이 생각난다.
가을이면 메주콩 삶을 때 고소한 냄새가 좋았으나 겨울에 메주 뜨는 냄새는 싫었다. 봄이 되면 뒤뜰에서 장 담그는 일도 도와드렸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 생각해보아도 나는 어머니에게 순종하는 아이였다.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이 많다보니 어머니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지금 어머니는 떠나가고 나 홀로 남아 있으니 쫑그랭이 시절이 그립다.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불행을 몰랐던 어린 시절이 감사할 뿐이다.
2006년 요셉동산 양로원 원목 신부로 있으면서 <하늘 아래 그 누가>라는 사모곡을 출간했다. 그 내용을 다 옮기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책 서문에 적은 글을 옮긴다.
사모곡
어머니!
잉태하면서 죽을 때까지
내 생명의 고향 삶의 요람
그 이름 가실 길이 없습니다
기나긴 밤 지새우며
기도하던 그 모습
새벽잠 덜어내며 밥 짓는 어머니
당신 생각하면 동화같은 추억들
어머니!
당신은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어머니! 하고
불러만 보아도 눈시울이 뜨거운 것은
하늘이 준 모성의 샘물이던가요?
보고 싶은 어머니
하늘 땅만큼 사랑했던 어머니
죽으면 잊을까...
_사모곡 ‘하늘아래 그누가’ 중에서
어머니를 위한 간절한 기도
어머니는 수술을 세 번 씩이나 받는 아픔을 겪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쯤 어머니는 30대 후반에 자궁근종으로 전주예수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날부터 어린 두 동생들을 데리고 십자가 아래서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그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어머니가 집에 오시지 못하면 우리는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공소집이었다. 사순절 때는 주일 공소예절을 마치고 십자가 아래서 십자가 길을 바치곤 했다. 어머니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어린 생각이었지만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치면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꼭 살려주시리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순진하고 깨끗한 기도였다.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일주일 후에 완치되어 집에 돌아오셨다. 썰렁했던 집안은 생기를 되찾았다. 우리 형제들은 소나기 지난 뒤 무지개가 뜨듯이 어머니의 사랑 속에 가정의 평화를 다시 얻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품에 안으시고 하늘나라는 이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치유의 은혜를 입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나의 기도를 기억한다. 그리고 믿고 있다. 우리 형제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를 드리고 있다. 주님, 찬미와 영광을 얻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