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초등학교 시절 (9회)

세월은 이와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정확한 계산자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과 겨울이 어김없이 찾아든다. 그동안에도 허굴산에 진달래가 몇 번이나 붉게 노을을 수놓았다.

나는 아홉 살이 되던 해 1947년에 삼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높은지’와 ‘장단’을 지나 을씨년스럽게 앉아 있는 작은 학교였다. 악견산, 금성산과 허굴산의 삼산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하여 삼산초등학교라 이름 붙여진 이름이다.

집에서 걸어서 반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지만 나는 이 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일본 시인 이사가와는 “소학교 전나무 용마루에 내가 던진 공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하고 읊었지만 나는 이 학교의 교실과 작은 운동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 동네 형들이 책과 공책을 싼 책보자기를 허리에 차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내가 막상 이 학교에 다니는 기쁨은 그런 것보다는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1학년 때의 담임인 권몽화 선생님 때문이었다. 권 선생님은 남선생님이었지만 자별하게 나를 귀여워하고 사랑해주셨다. 새침한 아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로 가위 나를 편애하셨다.

수업을 할 때에도 권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은 온통 나에게로 와 있었고, 풍금을 치며 노래를 가르칠 때도 선생님의 눈은 언제나 나에게 머무셨다. 어떤 교육잡지를 보니 교사가 교단에서 수업을 할 때에는 자기 눈보다 약간 위쪽을 바라보고 수업을 해야지, 결코 어느 특정한 피교육자를 보고 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충고는 결코 피교육자를 편애하지 말라는 점잖은 충고인 줄로 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권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늘 나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내가 늘 담임선생님만 바라보고 공부했기에 어쩌다 눈이 마주치니 담임이 나만 보았다고 착각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나는 그럴수록 담임을 더 따르게 되고 공부도 재미가 나 열심히 했다.

사실 1학년 때 나는 누구나 다 그러했듯이 담임은 인간이 아니라 밥도 안 먹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겼다. 그렇게 담임이 귀여워해주니 학교생활이 재미나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만 새면 학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일주일마다 공일이 원망스러웠다. 그 하루가 10년이나 되는 것처럼 다음날인 월요일이 기다려졌다.

그때는 해방직후라 모든 것이 어지럽고 어수선했다. 해방의 기쁨도 차차 사그라지고 새 출발을 하는 때였지만 무엇 하나 자리를 굳히지 못하고 허공에 뜬 때였다. 경제도 말이 아니었다. 물가도 많이 오르고 게다가 물자도 궁핍해서 모두들 반 거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짚신에다 버선을 신고 학교를 다녔다. 눈이라도 오면 등하교길에 버선이 젖어 아리도록 발이 시렸다. 검은 운동화나 검은 고무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산촌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시던 우리 아버지의 근검절약 정신은 내 신발에까지 따가운 통제령이 내려져 있었다. 겨울철에 눈구덩이에 빠지면서 등교하면 담임인 권 선생님은 아이들의 버선을 벗겨 일일이 교실 난로에 말려주셨다. 아, 이 글을 쓰고 앉은 이 밤에도 언제나 정겨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그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얼굴이 얼얼하도록 불러본다. 풍금을 타면서 재미나게 노래를 가르치고, 난로가에 버선을 걸어서 말려주시던 그 자상하시던 선생님이 지금도 생생하게 눈썹 끝에 밟혀온다.

“공부 열심히 하여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어라!”

선생님의 그때 그 말씀이 아직도 내 귓바퀴에서 큰 비중으로 맴을 돈다. 내가 미력하나마 오늘에 이른 것이 이 담임의 평범한 훈계 한마디에 말미암았다 생각하며 잠시 펜을 놓고 그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허물을 사죄한다.

내가 학교 생활에 기쁨과 재미를 가지게 된 참으로 별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나와 한반에 다니던 여자 아이 때문이었다. 얼굴이 동그람하고 유난히 눈이 맑은 아이였다. 어린 아홉 살짜리가 이성을 알아서가 아니라 어쩐지 나는 그 아이에게 호감이 갔다. 내 누이나 내 누나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애틋한 생각뿐이었다.

▲ 합천군 대병면 장단리에 위치한 삼산초등학교의 교적비 / 필자가 다녔던 삼산초등학교는 1998년 9월 대병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그 여자 아이 집은 우리 집과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하교길은 학교 근처 연못까지만 가끔 동행을 했다. 우리는 길가에 이운꽃을 이야기 하고, 웅덩이의 소금쟁이와 풀밭의 방아개비를 보고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연못 잔디에 앉아 어줍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나는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어쩐지 서운했다. 비온 뒤에 새로 돋는 싸리순처럼 청순하고 무구한 동심과 동심은 서로 어우러져 훨훨 허굴산 꼭대기로 타올랐다.

영국의 시인 W. 워드워즈(W. Wordsworth)는 무지개를 보고 감동하던 그 어릴 때의 동심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다고 노래했다. 어릴 때 감동을 받았던, 호수를 일생토록 떠나지 않고 살았던 시인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어릴 때의 그 동심을 허굴산 아래에다 곧이 묻어두고 추풍령을 넘어오지 않았던가. 정겨웠던 어릴 때의 친구와도 소식 없이 세월을 너무 오래 보냈지 않았는가.

지금은 한 아이, 한 어머니로서 이 나라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겠지만, 그 분의 행복과 건강을 빌면서 아홉 살 때의 그 옛날을 마음속으로 그려 볼 뿐이다.

나는 어릴 때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시해서 어머니한테 매일같이 옛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밤이면 화롯불에 밤이나 고구마를 묻어두고, 여름밤이면 모깃불에 옥수수를 묻어놓고는 옛 이아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콩쥐가 계모에게 구박을 받는 이야기를 들으면 몇 번을 들어도 눈물이 났고, 호랑이가 썩은 동아줄을 타고 승천하려다가 떨어져 죽는 장면에 이르면 고소해서 깨가 쏟아졌다.

“내가 인생의 불변법칙을 배운 것은 슈트라우스베르크 대학에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무릎을 베고 듣던 옛이야기 속에서였다.”

이 말은 시성 괴테의 말이다. 그렇다. 나도 괴테처럼 어릴 때 집안 어른들께 들은 그 옛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인생철학을 배웠다. 그 철학은 그 뒤의 내 인생 경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어릴 때 읽은 책 한권이나 이야기 하나도 인생을 조우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한편 나는 2~3학년 때부터 동네 개구쟁이 아이들과 함께 방과 후면 소를 먹이러 다녔다. 송지마을 뒤 산두마을로 넘어가는 <부치고개>에 소고삐를 목에 감아 방목을 했다. 해거름이 되면 우리는 옹바위 근처에서 소를 찾아 집으로 몰고 오곤 했다.

소가 풀을 뜯어먹는 몇 시간 동안은 우리의 즐거운 놀이시간이었다. 대개 이 시간에 우리는 공깃돌놀이, 자치기, 딱지치기, 말타기, 진빼앗기 등 실로 다양한 놀이를 했다. 그 놀이는 아기자기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허굴산 정상에 있는 용바위에도 올라가고 장군바위에도 올라갔다. 어른들한테 장군바위의 전설을 듣고 나도 장성해서 위대한 장군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어 보기도 했다.

늦은 봄의 밀 서리와 가을철의 콩서리 등도 이때의 재미있는 추억이다. 입언저리에 새까맣게 까먹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히히 웃던 그 옛날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다 무얼 하는지. 이밤, 문득 이은상의 ‘가고파’란 시가 내 베개 밑에서 그네를 뛴다.

서구식 목동은 아니었지만 풀피리나 호드기를 불던 그 허굴산 자락에 자리잡은 송지마을. 아, 꿈엔들 잊으랴. 강산이 깨어진들 그곳을 차마 어찌 잊으리. 노래와 낭만과 사람과 미움을 그곳에다 묻어두고 지금 천리타향 장안의 한 틈서리에 앉았으니 좁다란 내 가슴에 만감이 교차한다.

옛 선비처럼 만년에 낙향하여 한거(閑居)함이 좋으련만 산업사회로 접어든 현대라 그 뜻 이루지 못해 가슴만 태울 뿐이다. 그러나 내 고향 송지마을이여! 하늘에 사무치는 광영 있으라. 그러고 옛 조상들 유훈 지키며 그 고장을 빛내라. 우리 비록 겉돌아 인간 부재의 도시객창에서 머물더라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하늘을 나는 용마처럼 쉬 날아 돌아갈 수 있는 내 고향 송지마을에 광영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