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길 남도 40리 (10회)
  제2장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

우리 집은 비록 두메이기는 해도 고조할아버지 때는 500석이나 되는 토호였다고 한다. 대체로 그때는 한 마지기에 벼가 두 섬씩 났는데, 소작이 그 중 차지하고 나머지 한 섬을 지주가 차지했다. 

500석이란 이런 식으로 소작인으로부터 거두어들인 벼가 500석이란 뜻이므로 결국 논을 500마지기 가졌다는 말과 같다. 논 한마지기가 200평이니까 500마지기는 계단식 농법의 산골에서는 실로 천문학적인 평수가 된다. 할아버지는 그 많은 벼를 한곳에 다 쌓지 못해 논이 있는 단위로 마름을 두어 그 마름한테 이를 보관 관리케 하셨다. 

우리 집은 그 당시 저 석숭(石崇)의 부와 솔로몬의 영화가 부럽지 않았다. 안채로는 여섯 간 대청마루에 안방, 건넌방, 골방, 큰사랑, 작은사랑, 마굿간, 그밖에도 큰광, 작은광, 안방을 들여다보면 자개장롱, 반닫이, 마루에는 괴목 뒤주, 장독간에는 한 길이 넘는 오지독이 즐비하고, 사랑을 들어가면 산수병풍에 비단 보료가 깔려있고, 한 옆에는 문갑과 만권서(萬卷書 )도 쌓여있었다. 

광안에는 철따라 새로 나온 온갖 별미와 보물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부가 하루아침에 증발되고 말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큰할아버지가 동학의 의병수장이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의를 위해 칼날도 밟으신 어른이 하신 일이요, 하물며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는데 바친 성스러운 일에 누가 감히 토를 달수 있었겠는가. 이 일로 우리 집안은 살림이 완전히 거덜 나 버렸다. 

그래도 친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내가 초등학교 때는 마흔 마지기 정도의 산골 논을 가진 중농으로 살았다. 그것도 계단식으로 산비탈에 있는 천둥지기였다. 속설에 갓 쓰고 대님 메고도 모내기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쪼가리 논들이었다. 당장 양도(糧道)가 끊어진 것이 아니었지만 날이 가물면 벼 한 톨 구경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품이 든 만큼 소출이 따르지 못하는 구매농사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도 아버지는 두더지처럼 이 고장을 지키며 엎드려 사셨다. 선영이 있는 이 고장을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자식들이 나고 장성하자 마침내 아버지의 정신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셨다. 이 첩첩산중에서 자식들을 키우면 저 촉(蜀)나라 개가 해를 보고 짖었듯이, 자식들을 시대의 지각생으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드셨다 .

이리하여 마침 6.25전쟁이 일어난 전 년이 1949년, 우리가족은 남부여대(男負女戴)의 이사 길을 떠났다. 그때 내 나이 열두 살이었지만, 미우나 고우나 정든 고향을 떠나는 슬픔이 목구멍으로 곤두박질을 치며 공글러 올라왔다. 

내가 나서 자란 손때 묻은 우리 집, 코흘리개로 흙을 만지며 놀던 정겨운 고샅, 정월대보름이면 산의 나무를 잘라 와 달집을 지어 사르던 동구 밖, 내 꿈과 노래가 익어가던 삼산초등학교, 호드기를 불고 입술이 자줏빛으로 물들 때까지 진달래를 따먹던 허굴산의 그 늠름한 위용, 부침개를 토담너머로 주고받으며 사귀어온 정다운 이웃, 아니 풀 한포기 돌 한 덩인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 비록 지금은 역마살이 들어 동에다 솥을 걸고 서에서 잠잘지라도 내 어린 날이 간직된 이 고장을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마을을 떠나면서도 고개를 돌려 차츰 멀어져가는 송지마을을 눈물이 돋거니 맺거니 하는 두 눈으로 바라다보았다. 비록 내가 떠나도 허굴산에는 변함없이 봄철에 산 꿩이 울로 송지마을에는 여전히 해가 뜰 것이라 생각하니 어린 내 두 눈부리가 찡하며 목안이 맹맹해왔다. 
 
▲ 선영의 문중행사에서 참배하는 필자 / 1949년 우리 집은 선영이 있는 고향 송지마을을 떠나 삼가(三嘉)의 드무실(斗毛里)로 이사했다

애써 바라본 허굴산의 이마 위에는 석별을 서러워하는 듯, 흰 구름 두어 송이가 유유히 날아가고 있었다. 

허굴산아, 잘 있거라
송지마을도 안녕!

이삿길 남도 사십 리는 멀기도 했다. 두 발부리만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마음도 무거웠다. 발부리가 어디에 닿는지도 몰랐다. 앞으로 기다리는 불안과 근심이 가족들의 마음속에서 산디놀음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의 신경에 일대 정보가 울리고 불안과 의구심 속에 정착한 곳이 삼가(三嘉)의 드무실(斗毛里)이었다. 이 드무실은 면소재지인 삼가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쯤 떨어진 140여호 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마을은 내동(內洞)과 외동(外洞)으로 나뉘어졌으며, 정선(旌善) 전 씨와 안동(安東) 권 씨와 안악(安岳) 이씨, 신창(新昌) 노 씨 등의 대성 집촌이었다. 

우리 집은 외동에 있었으며 집 앞으로 가회면으로 통하는 3등 도로가 긴 띠처럼 가로놓여 있었다. 집 앞에는 기름지고 광활한 ‘사들’이 있었는데 여태까지 좁다란 산협의 논만 보던 나에게 큰 위압감을 주었다. 

들을 건너지르면 심천(深川)이 서남으로 흘러 단성(丹城)의 양천(梁川)과 합류하고, 남산이 돌올하게 솟아 먼 안산(案山)을 이루었다. 멀리 동쪽에는 소백산맥의 곁가지가 달려오다가 이곳에 앉은 이 고장의 명산 자굴산이 있어 옛 살던 송지마을의 허굴산을 연상케 했다.

한편 드무실 남쪽 심천가에 ‘홍실봉’이란 깎아지른 듯한 천길 기암절벽이 있었다. 무산(巫山) 12봉과 풍악산을 이기는 절경이며, 천년 묵은 심산이 있다고 전해지는 선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사립을 나서면 앞이 탁 트여 비옥한 사들의 논들이 다 우리 것 인양, 천군만마를 거느린 쾌승장군(快勝將軍)인양,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할 패기마저 용솟게 하는 그런 고장이었다. 그런데도 어린 나는 가끔 두고 온 우리의 옛 고향 송지마을을 꿈속에서 만나 한없이 기뻐하고 끝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는 면소재지에 있는 삼가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학교도 크고 아이들도 많은 으리으리한 학교였다. 나는 전학한 아리들이 으레 그렇듯이 처음 얼마동안은 외톨이였다. 그럴수록 오붓하고 조그만한 옛 삼산초등학교의 운동장을 머릿속에 떠올리곤 했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해주셨다. 

“판제야. 큰 고기는 큰 고기와 놀아야 하고, 작은 고기는 작은 고기와 노는 법이다. 웅덩이에서 자란 올챙이는 망망대해를 모른다. 차차 세월이 가면 친한 친구도 생기고, 너도 이 고장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러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한 치도 어김이 없었다. 갓 전학을 하며 가졌던 나의 ‘광장(廣場)공포증’도 얼마 안가서 사라졌다. 풋낯이 차차 익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도 생겼다. 
 
그런데 기죽은 이즈음의 나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준 분이 있었다. 담임인 조광석(趙光碩) 선생님이었다. 얼굴에 유난히 주근깨가 많고 언제나 웃음이 만면한 선생님은 전학 온 나의 고적감(孤寂感)을 아시는 듯 자별하게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수업시간에도 내가 손만 들면 나를 지명해 대답하게 하셨다. 그러고 그 대답을 극구 칭찬하셨다. 

“우리 반에 좋은 학생이 들어왔어요. 학습 진도가 저쪽 학교와 우리 반이 다른데도, 전학온 학생이 참 잘도 하네요.”

갓 전학 와 돌에도 나무에도 마음 붙일 곳 없던 나를 바로 잡아주시니 한없이 고마웠다. 마치 지옥에서 보살을 만난 듯, 황소가 등을 비빌 언덕을 만난 듯, 용기가 불끈 치솟았다. 그럴수록 더더욱 칭찬을 받으려 공부에 열중했다.

 
  삼산초등학교 시절 (9회)
  6.25 전쟁 겪은 삼가 드무실_1 (11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