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망가진 둥지_2 (14회)
  제2장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

내 친구가 하는 수 없이 시험지를 내어보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마침 그 시험을 잡쳐 성적이 별반 좋지 않았다. 그러자 회장의 아버지는 내 친구의 머리에다 꿀밤을 몇 대 안기며 비양거리는 말투로 나무랐다 .그러고는 내게도 시험지를 내라고 완강히 채근했다. 나는 자신 있게 산수 시험지를 쑥 내밀었다. 다행히 나는 100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회장의 아버지는 무색했던지 180도로 딴청을 피우는 것이었다.   

“이놈들, 나와 학교로 가자. 아, 서로 친구들이 의좋게 지내지 못하고, 그래 집단 구타를 하다니.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가자. 선생님께 혼 바람 좀 나봐야 되겠다.” 

그러고는 우리를 강제로 끌고 오던 길을 되짚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륵당을 지나 학교 옆 과수원 둑까지 가더니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다짐을 받았다.

“너희들 알겠느냐? 오늘은 이쯤 해두고 용서해준다. 앞으로 서로 잘 지내고 집단으로 아이를 때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알겠느냐?”

우리들은 그때서야 치사했지만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다시 되돌아오면서도 그 분함을 참지 못해 우리는 장차 순사나 장군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온다. 그 회장의 아버지가 우리를 쫓아온 것을 결코 탓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회장을 구타했으며, 시망스럽게도 회의진행을 방해했지 않았는가! 그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우리를 뒤쫓아 온 회장의 아버지는 교육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미상불 혼을 낼 듯이 건성으로 으름장만 놓고는 과수원 둑에서 타일러 우리를 놓아주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오늘날 남의 자식은 물론 제 핏줄이 비행에도 눈 한번 흘기지 않는 무관심한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가. 이에 비하면 그날의 회장 아버지는 소박하지만 따끔한 사랑의 꾸지람을 주신 분으로 지금도 기억한다. 

한편 내가 6학년인 1952년은 UN군이 압록강 수풍댐을 폭격하고, 제2대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함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이 되던 해다. 그런데 우리 6학년 담임은 우리를 순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했다. 매를 들고 교탁을 땅땅 치면 20평의 교실 안은 얼음가루가 날았다. 그러다가 그 매는 걸핏하면 우리에게로 날았다. 

나는 공부 잘하는 산골아이 몇과 모의해서 담임 배척운동에 나섰다. 물론 우리는 공부를 잘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을 위한 의협심이 작용했다. 담임이 화를 내면 좀처럼 풀리지 않아 온종일 수업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리는 이런 사실을 우선 교감선생님께 진정하기로 했다. 그때 교감선생님은 뒤에 경상남도 학무국장과 김해여교 교장을 지낸 이보근 선생님이었다. 성품이 자상하고 교육이념이 투철한 분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이 역모사건은 사전에 그 기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역모는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노발대발한 담임은 지체하지 않고 우리들에게 따가운 매타작을 했다. 그러고는 자갈이 깔린 가교사 복도에 우리를 꿇어 앉혔다. 몇 시간을 꿇어 앉았으니 정강이가 으깨어 나가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그 담임이 무서워 바지에다 반쯤은 뜨뜨무레하게 지려 지도를 그렸다. 

그런데 문제는 방과 후에 일어났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선생님까지 다 돌아갔는데도 우리 담임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그래서 우리는 꿇어 앉았다가 편힌 앉았다가 하며 담임이 나타나 용서해주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담임은 어쩌면 우리를 벌세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종 무소식이었다. 그런데 해가 기운 늦은 시간이었다. 저쪽으로부터 교감선생님이 두리번거리면서 다가오는 것이었다. 
 
▲ 6.25직후 어느 초등학교의 수업시간 [ⓒ NARA]
 
교감선생님은 매일 아이들과 선생님이 다 돌아가면 교내를 한 바퀴 순시한다는 것을 뒤에사 들어 알았지만, 그때는 참으로 반가웠다. 교감선생님은 우리 이야기를 다 듣더니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말라, 내일 담임선생님께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라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다리가 저려 우리는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교감선생님이 고마웠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이튿날 우리 담임선생님은 교감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나는 돌아오면서도 우리 담임이 제발 그 무서운 매로 때리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와 동시에 담임께 죄송하다는 일말의 뉘우침도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그 담임선생님의 깊은 것을 알 것만 같다. 사랑의 매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무리 민주교육이라 해도 상벌을 엄격히 하고 나무랄 때는 매도 드는 것이 오히려 교육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기사를 읽고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회상한 일이 있다. 그 신문에는 서울 어느 초등학교 6학년 교실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실려 있었다.  
 
아이들이 찰흙으로 공작을 하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잠깐 볼일이 있어 교무실로 갔단다. 그 동안에 아이들은 찰흙을 교실 천장에 던져 종유석처럼 주렁주렁 붙이고는 교실이 떠나가라 법석대고 있을 때였다. 교무실에서 돌아온 담임이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창가로 가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예상 밖의 선생님의 태도에 되레 주눅이 든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칠판 옆에 주렁주렁 걸어둔 매를 가져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근자근 분질러 버리더란다. 그러고는 비로소 아이들을 보고 말했다. 

“자, 여러분 나는 지금까지 이 매로 여러분들을 때렸지만, 이제 여러분 앞에 매를 들 자격이 없어졌어요. 자, 모두 나와 여러분들이 나를 때려요. 나를 잘못 가르쳐서 내가 없는 사리에 저렇게 천장에다 찰흙을 던져 붙였지 않아요? 어서 나와요, 어서.”

선생님의 이 앙칼진 호령에 아이들이 모두 마지못해 나와 선생님을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옛날에 우리 담임선생님께 내가 엄청난 반역을 했다고 따갑게 뉘우쳤다.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랴! 철부지였던 내가 감히 선생님을 배척하다니.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 선생님이 한껏 우러러 보이며, 모골이 송연한 송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사실 나는 그때 철부지의 나이였지만, 실은 퍽 조숙해있었다. 그때 월간잡지였던 <학생계>, <학원>을 탐독했고, 이광수의 <흙>이나 심훈의 <상록수>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것도 일독하고 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책 겉장이 헤질 정도로 읽었다 .

우리 집 사랑엔 밤이면 늘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내가 읽은 책 내용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럴라치면 나는 신바람이 났다. 기억력이 왕성하던 때요, 반복해서 읽어서 거의 원문 그대로를 청산유수로 좔좔 외었다. 

이 바람에 아이들도 때로는 울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며, 밤이 이슥토록 떠날 줄 몰랐다. 이 풋지식과 영웅이 된 우쭐함이 나로 하여금 선생님 배척의 그 어마어마한 대형 사고를 일으키게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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