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29회)
  제4장 청춘의 편린들

나는 이 편지를 받은 뒤로 한가한 틈만 있으면 그것들을 꺼내어 다시 읽었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물리지 않았고, 그녀 자신이 내 귀 곁에서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 편지를 받은 뒤로는 그 지겹던 군사 훈련에도 신명이 났다. 그 무섭고도 위험한 유격훈련도 이 기쁨으로 거뜬히 통과할 정도였다. 

실로 여인의 힘이란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만고의 영웅들이 여인 때문에 나라를 잃은 예도 많지만, 여인의 내조로 대성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튼 예비사단 훈련에서 돌아온 나는 계리사 시험준비를 위해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결강을 하고 고시반에 합류했다. 그럴 때 그녀는 깨알같이 쓴 강의노트를 나를 위해 다시 다른 새 노트에 깨끗이 옯겨 정서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주었다. 나는 그 노트를 읽으면 내가 실제로 강의를 들은 것보다도 더 자세하게 강의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학생들은 덤벙대는 성질도 있지만 옆에서 집적거리는 놈도 간혹 있어서 강의내용 일부를 놓치는 수가 많았다. 그러다 이 노트는 교수님의 기침소리까지 다 기록해놓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너무도 고맙고 흔감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이 뜨거운 사랑으로 나는 토끼 두 마리를 앉아서 잡을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그녀에게 보다 값진 것을 해주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나는 기어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내가 요즈음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선물은 합격증뿐이다.’

나는 이런 각오로 해이되기 쉬운 내 마음을 채찍질하고 달래었다. 그러나 아름답고 좋은 일은 오래 가지 않는다더니, 우리들 사이에도 엄청난 비극이 막을 열었다. 

그해 11월 말경이었다. 서릿발이 서고 입김이 뿌옇게 열 정도로 호되게 추운 날이었다. 나는 뜻밖에도 그녀로부터 장문의 편지 한통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만난 지 몇 날이 지난  날이었다. 나는 큰 부담 없이 그 편지 봉투를 뜯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점점 나의 동공은 면적이 확대되어 갔다. 참으로 기절초풍할 사연이 그곳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절연장(絶緣狀)! 그것은 무서운 절연장이었다. 그 순간 나는 몽둥이로 뒤퉁수를 호되게 얻어  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요, 뜻밖의 날벼락이었다. 나는 또 읽고 또 읽어보았다. 그런데 그 절교의 이유가 너무나도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를 나는 여기서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것이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위하고, 우리들의 지순한 사랑을 기념하는 예의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때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녀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도 엄청나게 컸다. 화려한 장미꽃밭에는 위험한 가시와 뱀이 있다는 옛말이 우리들의 사랑 속에도 이미 배치되어 있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이유가 진실인지 아닌지 그것조차도 아리송했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싫어서 기피하는 핑계로 이 엄청난 이유를 위중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직접 그녀를 만나 그 세정(世情)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상 그녀와 절친한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실로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수원 어느 절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 그녀의 편지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절간으로 도피행각을 별일 까닭이 없다고 여겨졌다. 참으로 일이 맹랑하게 되었다. 곰비임비 나에게만 따라다니는 재앙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극도의 자기혐오증에 빠져버렸다. 

머리를 깎이고 눈알이 빼이어 괴력을 잃은 삼손처럼 나는 철저하게 쭉정이가 되고 말았다. 며칠을 어정쩡한 가운데 고민하고 번민하다가 나는 현승종(玄勝鐘)당시 학생처장을 찾아갔다. 나 개인의 신상문제지만 현 처장님은 나더러 수원으로 가 그녀를 만나 다시 학교에 나오도록 설득하라는 말씀이었고, 그것이 당연한 도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 대학 시절, 절에서 계리사 공부하고 있는 필자
 
이리하여 나는 그 날로 수소문하여 수원근교에 있는 여승들만 있다는 그 절로 내려갔다. 그녀는 나를 보자 불난 산의 토끼처럼 몹시 당황하고 놀랐다. 그러나 나는 되레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더 놀랐다. 나는 내 지식과 들은 풍월을 다 동원해서 그녀에게 학교는 다녀야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몇 시간의 입씨름 끝에 그녀는 내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다. 며칠 뒤에 올라갈 테니 나더러 먼저 가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학교도 결강하는 날 없이 꼬박꼬박 잘 다녔다. 나는 그녀에게 또 다시 충격을 줄까와 가급적 접촉하는 것을 삼갔다. 가끔 강의실에서 마주치면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이후부터 나도 좀은 떨떠름했다. 내가 계리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웃으며 “축하합니다.”라고만 했다. 그리고 나는 “덕택입니다.”라고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뒤로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 나는 ROTC장교로 임관이 되고, 그녀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부설 기업경영연구소에 취직이 되었다. 얼마 뒤 기업경영연구소로 그녀를 찾아갔더니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엔 없었다. 그 동안에 그녀는 원망스럽고도 한 많은 세상을 떠나 이미 황천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비련치고는 최대의 비련이었다.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그게 그거지만, 누구나 한번은 가야할 길이라고는 해도, 그녀의 꽃다운 나이가 너무도 아까웠다. 나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발부리가 어디에 닿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녀와 함께 가졌던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이 내 머릿속에서 한 장 한 장 넘겨져 나갔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끄덩이를 쥐어뜯으며 허공을 향해 뭐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뭐라 질렀는지는 내 스스로도 몰랐다. 다만 모든 것이 물구나무를 서고, 모든 것이 나의 적처럼 얄밉기만 했다. 

나는 어느 주점으로 들어가 소나기 술을 퍼마셨다. 도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지만 주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도록 이를 깨물었다. 나는 웬만해서 눈물을 흘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날 밤만은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와 나누었던 그 무수한 일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고대 뒷산에서 그녀 앞에 내가 진한 사랑을 고백하던 일, 광나루 보트 위에서의 첫 입맞춤, 덕수궁과 비원의 숲속을 거닐며 약속했던 미래의 꿈들, 그리고 강의내용을 복사해주던 일. 아, 그 모든 것이 초롱초롱 되살아났다. 그녀는 이미 이 지구촌에서는 영원히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인가? 

통행금지가 다 되었다는 주인의 꺼끌꺼끌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거리에 나섰다. 가로등과 가게의 불들이 꺼진 밤하늘에 은하루가 선명했다. 그 순간 나는 술에 휘말려 있었지만, 일본 소설가 나카키와(中河興一)의 소설 내용이 문득 머리를 스쳐 달아났다. 

젊은 주인공 두 사람이 사랑을 했지만 끝내는 결혼하지 못하고, 여자는 딴 데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첫사랑을 못 잊어 고민하던 여인은 마침내 병에 걸려 임종에 다다랐다. 그때 남자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네가 죽으면 여름밤에 은하수 가로 나오너라. 그러면 내가 이 지상에서 그 은하수를 향해 폭죽을 무수히 쏘아 올릴게. 넌 그것이 네가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인 줄 알라. 

얼마나 지순하고 고매한 사랑인가! 살아남은 나도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해주어야 한다. 비록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녀에게 무언가는 선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실로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 승을 떠났지만 그녀가 나에게 남겨놓고 간 공동(空洞)이 너무나 컸다. 나는 근 10년간이나 그녀를 추모했다. 가끔 꿈에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그녀와 만났다. 낮이나 밤이나 내 외톨이가 된 마음은 언제나 그녀가 곁에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녀의 명복을 빌면서 우리의 사랑이 어느 누구의 것보다도 지순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나는 혼신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다고. 안녕, 안녕! 저 세상에서나마 부디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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