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공업과 기아자동차 (46회)
  제6장 국록을 먹던 공직의 바벨탑

그 당시 자동차공업에 대한 종합 육성대책에 대해 개괄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은 해방직후에는 군수용 중고차량을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변조 생산함으로써, 일부 보수용 부품생산공장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1955년 9월에, 우리나라 최초로 시발자동차회사가 완성차 ‘시발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2년 4월까지 2,940대를 생산, 공급하다가 동 5월부터 <새나라자동차회사>가 설립되어, 일본의 닛산자동차의 기술제휴로, 새나라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67년 5월에 <아세아자동차> 회사가 프랑스와 제휴해 설립되었고, 이어 1968년 5월에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와 제휴해 설립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신진, 아세아, 현대의 자동차 3원화 정책에 의해 품질 향상과 원가절하를 기하면서 국산화를 촉진해가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기아산업은 1962년부터 이미 삼륜자동차를 생상 공급해오면서, 기술 축적을 해 종합자동차 제조허가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9년, 국내 자동차수요는 고작 30,000여 대에 불과했는데, 기아산업을 포함한 4개사가 생산 공급하고 있는 승용차, 버스, 트럭, 삼륜차의 차종은 무려 31종이나 되었으므로, 다품종 소량생산에 의한 원가고, 품질성능의 저하, 기술 향상의 부진과 시설투자의 비효율성 등의 문제점이 대두되었으며, 국산화율도 평균 30%이하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수입부품도 어떤 조립제조회사의 경우에는 엔진, 샤시, 프레스 등 세 부분으로 수입 조립하고 있어서, 조립기술의 향상은 기하기 어렵고, 가격도 국제가에 비해 엄청나게 고가였다. 

원래 자동차공업은 수천 개의 부품으로 조립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총합공업>이라 하여 이 같은 자동차공업의 발전 없이는 도저히 기계공업은 물론, 중소 하청 부품공업의 발전을 기할 수 없으므로, 우리 경제의 산업구조의 변화와 고도화를 달성하려면 이 산업의 발전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것으로 대두되었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을 위시한, 여러 선진 자동차공업의 발전 연혁과, 그들이 추진했던 각종 정책과 피나는 노력을 종합검토해서, 기술적인 문제에서부터 정책적인 과제를 포함하는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그 대책 안에는 개별회사별로 연도별 국산화 달성 비율에 따른 차등 지원대책과 회사별 거래은행별 추진 대책등도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시책을 법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자동차국산화촉진법’을 제정토록하고, 관계부처와 학계, 업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동차국산화촉진위원회’를 설치 운영하여, 영도별 국산화 목표 달성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이 대책이 추진되고 있는 과정에서, 대통령께서는 자동차 3원화 정책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서, 일원화 정책으로 전환, 규모의 경제를 달선하여 국산화 촉진은 물론, 궁극적으로 수출산업으로 까지 육성토록 하는 시책을 강구해보라는 지시를 했다. 그 뒤 많은 노력과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했으나, 업계의 이해가 첨예화되는 문제라, 이것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아무튼 이 같은 작업과정에서, 어느 날 기아산업의 김철호 회장께서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김 회장은 키와 체구는 작았으나 목소리는 패기가 넘쳐, 처음부터 어딘가 모르게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우렁찬 목소리로 정부의 자동차공업 일원화를 위한 검토설에 대해 강력히 항변했다. 

“잘 아시겠지만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는 개인 개인이 자기 능력에 따라 기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기아자동차가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생산한 3륜 소형화물차 [제공 ; 기아자동차]

“물론이지요.”
 
“우리 기아산업은 말입니다. 아니 나는 말입니다. 처음에 두 바퀴 달린 자전거에서 창업을 했습니다.”

“예, 회장님. 그 유명한 삼천리 자전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뒤 우리 기아산업은 피나는 노력을 하여, 그 두 바퀴에다 동력을 단 오토바이를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또.......”

“예, 그 뒤 기아산업에서는 거기에다 바퀴를 하나 더 달아 세 바퀴가 달린 삼륜차 생산으로 발전이 되었지요.”

내가 이렇게 기분을 맞추어 드리자, 김 회장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자전거 생산에 동력을 단 오토바이, 삼륜차를 생산하기까지 꾸준히 경험과 기술을 축적해 왔습니다. 자랑 같지만 우리 기아야말로 진짜 자동차 회사고 국산화율도 제일 높고, 기술축적도 제일 많은 자동차 공업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 회사입니다. 내 죽기 전의 최대 소망은 바퀴를 하나 더 달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기아가 생산한 네 바퀴 자동차가, 이 나라 방방곡곡을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내 평생소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시대인데, 우리는 경쟁력을 이렇게 키웠는데, 정부는 무슨 근거로 나한테 바퀴 하나를 더 달려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김 회장은 이때 얼굴이 상기되고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이 김 회장의 솔직하고 진지한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에, 알겠습니다. 그 원대한 평생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를 문밖까지 정중히 배웅해드렸다. 오늘날 기아산업이 생산한 봉고 자동차가 도시에서 벽촌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철호 회장의 당당했던 그때 그 모습을 떠올린다.

이 부실기업 정리문제는 당시 도하 각 신문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도했다.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지만, 이 같은 사태에 이르기까지의 정부 책임문제나, 앞으로 발생 방지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한편 경제계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더러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1, 2차 5개년계획으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확대 성장을 지속해왔던 우리 경제는 그동안의 소비재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 위주 개발전략에서 중간재나 생산재 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중화학공업 개발전략으로 이행해가고 있었다. 이것을 ‘생산의 우회화(迂廻化)’라고 한다. 
 
70년대에 들어서면 그동안 경제개발을 위해 도입했던 방대한 차관원리금 상환기일이 돌아오고, 이것을 정상적으로 갚아나가면서 개발을 계속하려면 무엇보다도 수출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켜야 했다. 

그런데 소비재 위주의 수출전략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단위당 수출단가가 높고, 외화가득률이 높은 중화학 공업을 적극 개발해야 했다. 이 중화학공업은 수출의 획기적 증대는 물론, 산업구조 고도화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의 왕성한 투자활동을 뒷받침 한 것은 외자다. 그런데 앞으로는 물가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 저축에 의한 투자자원 조달비율도 점진적으로 증대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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