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의 울음소리 (1회)
  제1장 나의 세계(世系)와 가계(家系)

1939년 음력 3월 2일! 이 날은 내가 이 우주에서 가장 성스러운 산신(産神)의 손을 잡고, 이 지구촌으로 처음 온 날이다. 경남 합천군 대병면 양리. 허굴산(㠊堀山) 아래의 송지[松亭] 마을 188번지. 이곳이 바로 내 인생이 고해(苦海)에 닺을 올리고 고고(呱呱)의 울음소리를 터뜨린 곳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기까지는 그 시대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태어나던 해의 우리나라 정세는 일제에 의해 국민징용령이 공포되던 해였으며, 국제적으로는 독소(獨蘇)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는 한편,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지구촌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편, 내가 태어난 고향은 어떤 곳이었는가.

무릇 우주의 삼라만상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것은 천지의 만유가 가지는 귀소본능의 발로이다. 모든 과일은 뿌리 곁에 떨어지고, 호마(胡馬)는 설 때마다 북풍에 몸을 의지하며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태어나고 뛰놀던 언덕 쪽으로 머리를 향한다고 한다. 이처럼 고향은, 물론 생명 있는 동식물에게조차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자 무지개 같이 고운 구심이며, 아무 때라도 부담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의 귀의처(歸依處)이다.

화사한 부귀공명을 짊어지고, 어깨로 바람을 가르며 돌아가는 금의환향이 아니더라도 좋다. 탕자가 되어 적수공권으로 눈물을 앞세우며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무엇이 부끄러우랴. 무엇이 남사스러우랴. 나의 처지가 어떻게 변하든, 고향은 늘 제품에서 태어난 생명을 보듬어 안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고향에는 뽕나무와 닥나무가 있어 우리의 춥고 가난한 마음을 다독거리며 덮어주고 따뜻하게 입혀주었다. 비록 은쟁반이 아니더라도 그 소박한 질그릇과 투가리 속에 넘쳐나는 인정은 생각만 해도 우리를 배부르게 한다. 손가락 지문이 닳아 무인(拇印)조차 찍지 못할 정도로 흙과 함께 살던 고향 사람들, 그 구수한 사투리에 묻어두었던 어릴 적 옛일들이 한 가닥 한 가닥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누가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고 헤프게 말했던가. 누가 먼 일가보다 이웃사촌이 낫다고 해깝게 말했던가. 제 아무리 타향의 달을 이고 주지육림 속에서 거문고를 뜯어도 허물어진 토담 너머로 호박 부침개가 오고가던 두메 고향의 투실투실한 그 인정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한 길이 넘게 철조망을 두른 벽돌담 너머로 제 아무리 마음이 건너오고 건너간다 한들 핏줄로 이어진 일가보다 더 뜨거울 수 있겠는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쇼팽은 고국을 떠나 외국으로 유학을 갈 때 조국의 흙 한줌을 싸가지고 떠났다. 우리도 사할린 교포 위문 방문 때 조국의 흙을 복주머니에 싸다주지 않았던가.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국민들은 세계 각처를 유리(遊離) 방황하면서도 그 나라를 되찾는데 2000년이 걸렸다.

어찌 그 뿐이랴. 세계의 구석구석에 흩어져 사는 저 숱한 화교들은 오늘도 그들 조국의 풍습과 언어를 잃지 않으며 자랑스럽게 지켜나가지 않는가.

내 고향 합천은 5만분의 1지도를 펼쳐놓고도 한참만에야 찾을 수 있는 육지의 고도(孤島)이다. 한때는 더러 합천이 경상북도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합천은 호국불교의 근원지이며, 겨레를 가르쳤던 8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가 있는 곳이다. 임진(壬辰)과 그 병화(兵火) 때 승병을 일으켜 왜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도 해인사였다.
 
▲ 유년의 꿈이 서려 있는 송지마을

신라의 최고운(崔孤雲)이 솔처자(率妻子)하여 둔세입적(遁世入寂)하기도 했던 유서 깊은 땅일 뿐만 아니라 죽죽장군(竹竹將軍)이 아버지 김품석과 더불어 대야성을 백제로부터 지키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지고, 이성계의 국사(國師)가 되었던 박무학도 이 고을 대병(大幷)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3대 거유(巨儒)의 한 사람이었지만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고 오로지 후학의 교육에 전념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도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수제자이자 백의정승으로부터 천하를 호령하던 정인홍(鄭仁弘)도 이 고을의 하늘을 이고, 이 고장의 물을 마시며 살았다.

이처럼 역사적인 유서가 켜켜이 묻어 있는 합천은 오늘날 여느 고장보다도 강호의 사람들로부터 더 찬란한 각광을 받고 있다.

합천의 군청소재지인 합천읍에서 서쪽으로 50여리를 가면 합천령을 베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옛 고을 ‘대병(大幷)’ 이란 곳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내 고향인데, 마을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평면과 병목면이 병합되어 대평면의 ‘대’자와 병목면의 ‘병’자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곳은 자연경계가 뛰어나서 마치 신선이 노닐던 무릉도원을 방불케 한다. 황매산(黃梅山), 일명 황산(黃山)에서 흘러내려 마을 뒷산을 이룬 깎아지른 듯 아아(峨峨)한 허굴산의 위용은 저절로 보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정상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오른 돌기둥이 셋 있는데, 일컬어 ‘용바위’라 한다. 금시라도 여의주를 문 용이 하늘로 꿈틀거리며 날아오를 듯 웅대한 비상을 꿈꾸고 선 듯한 형상이다.

‘송곳바위’를 옆으로 지나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허리로 내려오면 병풍을 휘두른 듯한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널따란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유서 깊은 장군대(將軍臺)이다. 임진왜란 때 ‘박 장군’, ‘조 장군’ ‘정 장군’ 등이 이 바위에 구멍을 뚫어 새끼줄을 매고 북쪽 악견산과 서북쪽 금성산까지 그 새끼줄을 연결하고는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매달아 놓았다. 그러고는 새끼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니 왜병들은 신출귀몰하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부하를 거느리고 하늘을 나는 것으로 오인하고는 혼비백산 하여 도주하였다고 한다.

장군대를 지나 동쪽으로 돌아나가면 임진왜란 때 유명한 선비 이노파 선생이 피난했다는 유현(幽玄)한 막수동(莫愁洞)이다. 그 골짜기에 마치 가마솥처럼 생긴 소(沼)가 하나 있는데, 깊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검푸르다. 그 물이 흘러 ‘황계폭포’를 이루고 있다.

이 허굴산의 서북쪽에 우뚝 솟은 금성산은 그 옛날 봉수대가 있어 단계(丹溪)의 입암산 봉수대와 화답하고, 합천의 소현산 봉수대와 봉화로써 국가의 위급을 서로 전하던 산이다. 허굴산의 동북쪽에는 기봉(奇峰)이 돌올(突兀)한 악견산이 있는데, 이 산은 옛날 나의 17대조 박졸당(朴拙堂) 선생이 옥산정서실(玉山亭書室)을 지어 후진을 강학(講學)하며 은거하신 산이다.

이와 같은 명산의 정기를 받았음인지 권석로 선생, 이노파 선생과 임사부, 임곡 선생같은 대석학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

 
  머리 말_2
  그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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