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 (2회)
  제1장 나의 세계(世系)와 가계(家系)

나는 산서(山書)를 읽지 않아 풍수지리설엔 문외한이지만 우리 옛 조상들은 택지를 고를 때에도 청룡 백호가 좌우로 울을 치고, 앞에는 안산(案山)이 있고, 그 아래에 시내가 흐르는 남향받이로 대들보를 얹었다. 그래야만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을 따듯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동서남북에 앉은 산은 알게 모르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장래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런 환경에 대한 철학은 중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제나라 제상 안자(晏子)가 초나라에 갔는데 초나라 왕이 의뭉스럽게도 여러 신하와 약속하여 안자를 골려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초나라 왕은 안자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이때 왕의 신하 하나가 어떤 사람을 결박해왔다. 왕은 야지람스럽게도 시침을 뚝 떼고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는 도둑질을 한 제나라 사람이라고 대답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초나라 왕은 제나라 재상인 안자를 보고는 제나라 사람들은 워래 도둑질을 잘 하느냐고 비아냥 거렸다. 이 말을 들은 안자는 염불이 나서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것을 지그시 누르고 다음과 같이 점잖게 대답했다.

“귤이 회남(淮南) 땅에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 땅에 나면 탱자가 되옵니다. 그 잎은 서로 비슷하오나 그 열매의 맛이 같지 아니함은 수토가 다르기 때문이옵니다. 지금 결박해온 저 사람이 본시 제나라에서 나서 자랄 때에는 한 번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사오나 이 초나라로 들어와서 도둑이 된 걸 보면 이 초나라의 수토가 저 사람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이 얼마나 당찬 역설인가. 이 안자의 역설은 실로 환경철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우리의 옛 조상들도 문안을 할 때에는 곧잘 “서수(柴水)가 어떠하오십니까?” 하고 물었다. 서수는 물론 ‘땔나무’와 ‘마실 물’을 말한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말 하지만 그 근본으로 거슬러 가면 자연이나 환경 여건과 직결된다. 나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상자지향의 외곽지대를 장황하게 풍광경미 하고 역사 창연함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내가 고고의 울음소리를 터뜨린 ‘송지마을’ 그 자체도 범상이 아닌 길지이다. 주산인 허굴산의 용바위로부터 송곳바위로 흘러내린 구릉이 우백호의 형상으로 마을 우측을 에워싸고, 또한 송곳바위로부터 한 줄기가 흘려 내려 마을 바로 옆으로 해서 좌측으로 휘어잡아 좌청룡으로 형국을 이루었다.

멀리 황매산으로부터 달려온 자락이 마을 코앞에 와 앉아 있어 안산(案山)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좌청룡 우백호와 안산 앞으로 돌돌돌 옥이 굴러가듯 맑은 개울이 흐르니 이만하면 소위 산리(山理)에서 말하는 형국론이 나무랄 데 없이 다 갖추어진 명당복지이다.

어찌 그뿐이랴. 30여 호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이 송지마을의 동구 밖에는 7, 80명이 함께 올라 앉을 수 있는 집채더미만한 너럭바위가 둘이나 앉아 있다. 그 두 바위 곁에는 속이 빈 느티나무가 천년세월을 품으며 숱한 역사를 풍자하듯 서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옛날 유비와 관우, 장비는 복숭아 동산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의형제를 맞았다지만 우리 송지마을 사람들에게는 이 느티나무 밑 너럭바위가 안식처이자 구심체가 되어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 허굴산 정상의 표석
  
▲ 허굴산 송곳바위

여름이면 이 느티나무 그늘 밑에서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했고, 촌로들은 신선놀음을 했다. 설날이 오면 느티나무 가지에 그늘을 메고 그 아래에 널을 놓았는데, 타고 뛰며 휘날리는 동네 처녀와 젊은 아낙들의 녹의홍상(綠衣紅裳)은 민속화에 남아있는 전형적인 풍경처럼 우리네 정취와 멋을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했다. 아득한 예로부터 황매산하(黃梅山河)에 매화낙지(梅花落地)의 선경이 있다더니 여기가 바로 그런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송지마을을 중심으로 한 이 고장에서 이름 높은 학자나 충신, 효부, 열녀, 장군, 대사(大師)들이 줄을 이어 태어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명산대천 속에서 태어난 나 같은 우수마발(牛溲馬勃)도 앞에 말한 제나라 사람과 달리 이 고장을 떠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버티고 살았더라면 내 이력도 지금보타 더 화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이 고장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꿈 많던 어린 시절을 이 산천경개 속에서 보내며 살이 오르고 뼈마디가 굵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자고로 성현이나 위인들은 대개 탄생설부터 범인들과 다르게 기이했다. 더러는 알에서 낳고, 더러는 다른 동물과의 교배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인(異人)이나 대인(大人)들처럼 탄생에 관해 특별이 기이한 들은 바는 없다. 그저 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탯줄을 끊고 이 세상, 이 고장으로 왔다.

아버지는 비록 키는 작았으나 담이 크고 힘이 센 장사였다. 백중(伯仲)이나 추석 때 씨름판에 나가면 언제나 판막음을 하셨다. 흥겨운 농악판이 벌어지면 땅띔, 버꾸놀음으로 넓은 운동장을 한 두 바퀴나 돌만큼 그 기운이 대단하셨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허굴산의 정기를 받았느니, 장군대의 기백을 받았느니 하며 감탄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16세의 어린 나이로 시집을 오셨다. 원래 우리 어머님은 지청천(池靑天) 장군과 한 문중인 충주 지 씨의 본데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낮선 타성(他姓)바지 집안에 왔으니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두렵기만 하셨다. 시어른들의 밭은 기침소리만 들어도 공연히 가슴이 떨리고 꾸지람이나 듣지 않을까 조마조마해 하며 몇 번이고 장독대에 숨어서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 허굴산에서 맑은 솔바람 소리 들려오면 고향에 두고 온 옛날이 한 장 한 장 되살아나 어머니의 베개 맡은 늘 눈물로 홍건하였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고 그렇게 수삼 년을 보낸 어느 날 어머니께 기어이 무서운 찬바람이 몰아닥쳤다.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과 매섭고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마침내 토담너머로까지 넘어가게 되었다.

“에이구, 절이 망하려면 새우장사가 기어든다더니, 남의 가문에 들어와 자식을 못 낳으면 칠거의 악을 범하는 게 아닌가?”

“아 이르다 뿐인가? 이러다간 영영 우리 집안의 사립을 닫겠어.”
“그럴게 아니라 아예 새 장가를 보내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보는 게 어떨까?”

이렇듯 다섯 고모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불만과 불평은 잦아들 줄 모르고 높아만 갔다. 우리 어머니가 배태(胚胎)를 못하니, 내 아버지를 숫제 새 장가를 보내야겠다는 입맛 떫은 내숭들이 분분했다. 어른들의 이 불만과 불평은 구르는 눈뭉치처럼,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점점 커가기만 했다. 이룰수록 우리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일 점 혈육도 낳지 못한 자격지심으로 어깨가 축 까부라치고 면구스러워서 집안에선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정말 큰 죄라도 지은 듯한 강박관념으로 늘 가슴이 옥죄어 오고 집안 어디에서나 설 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박 씨 문중에서 쫒겨나 천하 뭇사람들의 걸고 싼 입방아에 올라 웃음거리가 되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귀찮고 자기를 따돌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고고의 울음소리 (1회)
  헛되지 않은 어머니의 치성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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