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지 않은 어머니의 치성 (3회)
  제1장 나의 세계(世系)와 가계(家系)

이 세상이 무변광대하고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머니만 소외되어 천애의 외톨박이가 된 것 같은 고독감을 짓 씹으셨다. 예로부터 시집살이가 고추당초보다 더 매워 지나가는 말로 눈멀어 삼년, 귀멀어 삼년을 살았다지만 우리 어머니는 결혼 당초부터 이 같은 큰 시련을 겪으셨다.

그러나 이 껄끄러운 사면초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내 조부모님만은 소탈하여, 당신의 며느리를 귀여워하여 불만의 화살을 던지지 않으셨다. 설마하니, 때가 이르면 손자를 얻으리라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 며느리를 감싸 주셨다.

실의에 차 허탈감에 빠져있던 우리 어머니는 마치 패장이 구원병을 얻은 듯, 십년 대한(大旱)에 단비를 만난 듯이 새로운 희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그날부터 조왕신(竈王神)께 빌고, 밤이면 몰래 나와 정화수를 떠놓고 명천(明天) 하느님과 허굴산의 용바위와 장군바위에 지극한 치성을 드리셨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명천 하느님, 일월성신님, 부디부디 화위동심(化爲同心) 하옵소서. 거룩하신 용바위님과 장군바위님, 저에게도 여의주를 내려주옵소서. 그리하옵고 장군바위님, 저에게도 기린옥동자(麒麟玉童子)를 점지해주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어머니는 그 후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셨다. 궂은 것을 보지 않고, 나쁜 것을 듣지 않고, 더러운 것을 맡지 않고, 오로지 바르고 곧은 일만 생각하고 행하셨다. 지붕 위에 박이 열려도 맨 먼저 달린 박을 따서 바가지를 만들어 정갈하게 쌀을 담아두었다가는 탁발승에게 시주하기를 잊지 않을 정도로, 돌에도 나무에도 치성을 다하여 아기 가지기를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의 치성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시집온 지 6년만인 두 살 때, 치성의 영험으로 태기가 있었던지 나를 잉태하셨다.

뉘라 이 오묘 무극한 자연의 섭리와 숭고무한한 창조에 감사하지 않으랴만 어머니의 기쁨은 어느 사람보다도 배가하셨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따가운 눈총과 원망의 화살을 받고 있던 어머니라 여북했겠는가. 여태까지 무색(無色)이었던 만물이 비로소 제 빛깔로 보였고,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의 이 성스러운 사실에 황금목걸이를 달아주는 듯 하였다. 이 희소식을 접한 집안 어른들의 희희낙락하던 모습을 어머니는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셨다.

이 경사로 어두웠던 우리 집안에 다시금 휘황한 빛살이 내리고, 노래와 싱그러운 리듬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락과 희망의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사이에 어머니는 자주 태몽을 꾸셨다. 커다란 수탉 한 마리가 지붕마루 위에서 위세 있게 홰를 치더니 어머니 치마폭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어머니는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으셨다. 조금이라도 산신이 부정을 탈까봐 걱정하셨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은 꿈에 외가에 가, 커다란 ‘두리감’을 따서 소쿠리 안에 수북이 담으셨다. 어머니는 그 꿈을 꾸고는 앞 꿈과 합쳐 생각하니 생남(生男)할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확률은 반반이지만 어머니는 태몽을 종교처럼 고귀하게 믿으셨다. 그러나 이 믿음을 섣불리 가볍게 발설하지 않고 가슴 밑바닥에 은밀히 묻어두고 광영의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셨다. 
 
정성들인 태교의 긴긴날을 보내고 드디어 성스러운 분만의 날이 가까워오자 할아버지는 유달리 노심초사하셨다. 원래 조부님은 육갑을 짚으며 오행도 웬만큼 알아 번득이는 영감으로 우리 어머니의 순산을 꾀하셨다. 산일이 다가오자 조부님은 우리 아버지를 시켜 장단(長湍)골 정진사 댁으로 보내어 그 집 은행나무를 몰래 꺾어오게 하셨다.
 
▲ 어머니

그것은 산모를 초죽음시키는 산고를 털고, 부정을 막는 방패로 삼기 위해서였단다. 아버지가 그 나뭇가지를 꺾으려 정진사 댁으로 가셨는데, 마침 그 날은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뭇가지를 꺾어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허리까지 크게 다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39년 음력 3월 2일, 나는 천 자루의 비수로 어머니의 배를 휘젓는 고통을 주며 마침내 이 세상에 고고의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이 울음소리가 터지자 어머니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큰할머니께서 함께 울음을 터뜨리셨단다.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너무나도 흔감(欣感)하고, 너무나도 대견해서 나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으리라. 그리고는 탯줄을 끊자 조모님들은 서로 얼싸안고 너울너울 춤까지 추셨다.

경사로다 경사로다 / 박씨 가문 경사로다 / 허굴산의 산신령님 / 장군바위 영험내려 / 금지옥엽 점지했네 / 금자동아 은자동아 / 박씨 가문 옥자동아 / 삼천갑자 명을 받고 / 석숭같은 부를 타서 / 천년만년 누리어라 / 천년만난 누리어라

두 조모의 노랫소리는 우리 집안만 아니라 뒷담을 넘어 동네방네 골목마다 굽이굽이 퍼져나갔다. 이처럼 나는 조부모님과 집안의 여러 어른들의 기대와 희망 속에 에 세상의 하늘을 처음 이게 되었다.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 부모의 은혜와 사랑이 이 지상의 어떠한 사람보다도 숭고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머리를 돌려 심지관경(心地觀經)을 펼쳐보자. 그곳에서 우리는 위대한 설교를 듣게 될 것이다. 이 심지관경은 우리들에게 어버이의 은혜가 지중하다는 예로, 어머니가 지닌 열 가지 덕을 내세우고 있다.

첫째로, 태아의 의지하는 곳이 모체이니 어머니는 대지덕(大地德)을 지녔고
둘째로, 산고를 치르니 능생덕(能生德)을 지녔고
셋째로, 심신이 부정할까 유의하여 기르니 능정덕(能正德)을 지녔고
넷째로, 춘추로 유의하여 기르니 양육덕(養育德)을 지녔고
다섯째로, 진실한 지혜로써 교육하는 지자덕(智者德)을 지녔고
여섯째로, 항상 방정(方正)하도록 타이르니 장엄덕(莊嚴德)을 지녔고
일곱째로, 유아의 안식처니 안온덕(安穩德 )을 지녔고
여덟째로, 선행을 교도하니 교수덕(敎授德)을 지녔고
아홉째로, 악행을 못하게 훈계하니 교계덕(敎誡德)을 지녔고
열째로, 가업을 전수하니 여업덕(與業德)을 지녔다.

이 지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 같은 십덕(十德)을 지니고 있었고 아버지를 그 집안의 태양이라 하고, 어머니를 그 집안의 달님이라 일컫는다.

딴은 우리 어머니도 맹모나 신사임당에 못지 않은 자정(慈情)을 지니고 계셨다. 내가 좌절하고 실의에 차 있을 때나 우리 집이 땡전 한 푼 없이 기울어 도탄에 허덕일 때도 어머니는 언제나 큰 기둥이 되어 주셨다. 나에게 불어 닥치는 모든 바람을 막고, 나에게 엄습하는 모든 병균을 당신이 내신 가로맡으셨다.

천성이 과묵하고 온화한 어머니는 뼈를 깎고 살을 저미면서도 나의 도약과 계기를 위해 촛불을 키셨다. 내가 요만한 오늘을 가져오고, 요만한 그릇이 된 것도 돌이켜보면 이 태임태사(太任太師)에 못지않은 어머니의 남다른 보살핌과 자정의 덕분이셨기에 오늘도 그 어미를 불러본다.

어머니! 면죄부를 드려도 어느 하나 토를 달지 않을 우리 어머니! 심지관경에서 말했듯이,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흰 피젖을 180곡(斛)이나 마셨다. 이 모유 값을 시가로 환산하는 용렬한 자식이 어디있을까만 어머니는 실로 우리의 고향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 어머니의 이름을 목이 터지게 외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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