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안의 가승(家乘) (7회)
  제1장 나의 세계(世系)와 가계(家系)

마지막으로 내 집안의 가까운 가승(家乘)을 간략하게 추려본다. 

내 7대조이며 중시조인 밀성부원군의 19세손인 휘 덕삼(德三) 할아버지는 자(字)가 화견(華見)이며, 1728년에 나서서 기유년에 돌아가셨다. 벼슬이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품계로 정삼품인 통정대부셨다. 배위는 숙부인이며 강릉 유씨시다. 

내 6대조 휘 여익(汝益) 할아버지는 자(字)가 여중(汝中)이며, 1750년에 나셨다. 벼슬이 한성좌윤에 이르렀고, 품계로 종2품인 가선대부셨다. 배위는 정부인 진양 강씨시다. 

내 5대조 휘 행춘(幸春) 할아버지는 자(字)가 면겸(面兼)이며, 1771년에 나셨다. 벼슬이 동지충주부사에 이르렀고, 품계로는 종1품의 승정대부셨다. 배위는 정부인 김해 김씨시다. 

내 고조부인 휘 영태(英泰) 할아버지는 500석의 토호였고, 배위는 김해 김씨이며, 증조부인 휘 희연(熙演) 할아버지는 장단골에서 한약방을 하셨고, 배위는 동래 정씨시다. 

내 종가인 휘 용재(龍在) 할아버지는 네 동기간 중 맏이셨으며, 배위는 거창 신씨시다. 할아버지께서는 학행을 좋아하셨으므로 세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셨다. 그 당시는 조선의 말엽이라 이도(吏道)가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세도 문벌의 정실급제마저 없지 않았다. 

이러한 부정부패가 창궐하던 때에 백면서생이요 벽촌의 무명 유생이 과거에 응시했으나 언강생심 될 법이나 할 일인가. 가정(苛政)이 맹어호(猛於虎)라더니 지방관아의 수령방백도 이때 노략질이 심해 백성들은 삼순구식(三旬九食)의 도탄에 이르렀다. 견디다 못한 민초들은 마침내 1892년부터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이다. 

이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마침내 청일전쟁이 일어났으며 나아가서는 일본이 우리의 내정까지도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물 끓듯이 민중이 일어나자 휘 용재 할아버지는 그 의병으로 가담하여 수장이 되었다. 조정이나 지방관아의 가렴주구(苛斂誅求)나 부정부패를 좌시할 수 없었고, 더욱이 지방 유생은 등용의, 길마저 막혀버린 절망적인 때라 이 전쟁에 가담할 수밖에 없으셨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리하여 동학군에 군자금을 대느라 500석의 살림이 거덜이 났고, 수장으로 맹활약을 하셨다. 가까이 사셨던 노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휘 용재 할아버지는 작전 수행상 그 지방의 말을 열다섯 필 징발하셨단다. 그러자 가난한 말 임자들이 진영으로 찾아가 그 말을 돌려달라고 애원을 했단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말을 도로 돌려주시며 이러셨단다. 

“백성들을 위해 동학을 일으켰는데, 백성들이 곤란을 겪는대서야 되겠냐.”

사실 그 당시 산촌에서 말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사람이 이동하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소중한 재산이기도 했다. 

휘 용재 할아버지는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 7월 15일에 하동전투에서 장렬한 싸움 끝에 향년 31세로 전사하셨다. 같은 31세의 나이로 향우(項羽)는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져 오강(烏江)가에서 자문(自刎)했고, 휘 용재 할아버지는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전사하셨다. 
 
▲ 휘 용재(龍在)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하동 고성산성 능선에 있는 동학혁명군 위령탑

이 기별을 들은 친할아버지는 막내였지만 그때 14살 나이로 형님의 시신을 찾아오려고 하동지방으로 가셨다. 둘째, 셋째 할아버지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맏형이 가담하였기에 전라도와 충청도로 피신하고 안 계셔서 친할아버지께서 가신 거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하동 근처의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룬 그 전투현장에 당도했으나 도저히 시신을 찾을 길이 없으셨단다.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다가 부패까지 해 도무지 얼굴을 식별할 수조차 없으셨단다. 하는 수 없이 친할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와서는 다시 스님을 모시고 가 형님의 혼백을 불러 모시고 와 허굴산 장군대 옆에 초혼장을 하셨단다. 

그런데 그 당시 지관이 그 못자리는 집안을 당분간은 망하게 하나 3대 후에는 크게 흥하게 할 자리라고 했단다. 이 소리를 듣자 집안식구들은 이왕 동학전쟁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망하는 판인데, 3대 후라도 가운의 융성을 바라보자는 심정으로 그냥 그 자리를 택하셨다. 

나는 휘 용재 할아버지의 순국 충절이야기와 선영에 대한 풍수지리설을 친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듣고, 막연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 설이 잘되도록 노력했다. 

한편 친할아버지 휘 주재(注在) 할아버지는 종친 화합과 활인구제로 만인이 다 우러러보았고,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셨다. 배위는 진양 강씨시다. 특히 내 유아기의 인격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주셨다. 우주만유의 존재와 이치의 본질을 쉽게 가르쳐주시고, 정신위생의 기둥을 세워주셨다. 

“문제아는 문제 가정에서 태어난다.”

교육학자 닐(Nell)의 말이다. 내가 이만한 오늘을 가졌고, 나의 행동반경에 정신적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의 가정교육에 힘입은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할아버지로부터 보학교육을 받았다. 우리 가문은 물론 타가문의 조상이나 뿌리에 관한 교육이었다. 

나는 어느 때, 현대문명 속에서 고리타분한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항변을 하다가 종아리를 호되게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다니고 소견이 트인 뒤엔 이 뿌리 교육이 큰 영향을 주었다. 즉 서울서 뼈를 깎는 각고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되레 긍지를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의 그 철저한 ‘뿌리교육’의 덕분으로 생각한다. 

아버지의 휘는 종덕(鍾德)이시다. 키는 작았으나 힘이 장사였고, 몸가지기를 삼가고 근검절약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왜놈이 가르치는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하셔서 신학문은 접하지 못하셨으나 친우관계가 대단히 좋았고, 능변이며 설득력이 빼어났다. 학자인 외숙과 토론하면 되레 외숙께서 궁지에 몰릴 정도로 논리정연하셨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종가(宗家)의 할아버지가 동학 창의(倡義)로 요절하셔서 후사가 없었으므로 출계(出系)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둘째 할아버지와 셋째 할아버지는 아드님 한분밖에 두지 못하셔서 출계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두 아들 두신 할아버지의 장남이신 우리 아버지께서 종가로 출계 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지청천 장군과 동문인 충주 지씨이며 함자가 정(丁)자 순(順)자시며 내 외조모부님은 성(聖)자 삼(三)자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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