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촉진법 추진 (49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이 해 유신국무회의를 통과한 법률 중 우리 경제에 또 하나의 주요한 역할을 한 법률이 있었다. <기업공개촉진법>이 그것이다. 이 법은 1972년 12월 30일에 제정되고 1973년 1월 5일부터 시행되었다. 

이미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리는 맨주먹으로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혼신의 힘을 경주해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재정, 금융, 세제상의 모든 지원책도 강구했다. 뿐만 아니라 부실기업 정리라는 충격적인 요법을 통해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는 그릇된 기업 경영풍토에서, 기업가과 기업인은 공동운명체라는 각성도 심어주었다. 

거기에 더해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8.3조치를 통해 국민의 사채까지도 동경, 개별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해주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조치가 아무리 국가와 국민이 잘 살기 위해 취해진 정책과제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경제를 전체 ‘숲’으로 본 이야기지, 그 숲을 이룬 개별적인 ‘나무’ 하나하나를 보면 우리 경제는 여러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문제 중 제일 큰 것이 경제집중력 문제였다. 물론 없는 자원을 집중해서 경제건설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 같은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엄청난 격차문제, 지역 간 균형이 맞지 않는 발전문제, 도시와 농촌 간의 현격한 격차, 부익부빈익빈의 심한 소득의 격차 문제 등 지역 간 계층 간 많은 갈등요인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갈등은 정치적 차원, 더 나아가서는 통치적 차원에서는 물론이요, 정책적 차원에서도 매우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난 10년간 잘 살아보기 위해서, 또 공업화를 이루기 위해서,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피땀흘려 일 해왔다. 그러나 우리 일반 국민에게 무슨 소득이 있었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일반 국민 사이에는 이 같은 진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는 달리 국제적으로는 우리 경제 개발 전략을 높이 평가하고, 대체로 장래의 전망을 밝게 보고 있는 경향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과 분위기에서 지금까지 성장해왔던 장래 전망이 밝고 공금리 수준 정도의 배당이 가능한 주요 기업을 공개하여 전 국민이 주주로 참여하는 국민적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과제가 되었다. 국민 다수가 주주가 되면 그 기업은 한 개인이나 어느 특정 가족의 기업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기업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 나오는 소득은 배당을 통해 국민소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경제정책 입장에서 보더라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즉, 자본시장을 발전시켜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동안 공업화 결과 늘어난 소득을 투자할 수 있는 대상을 다양하게 마련해주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막대한 기업소요자금을 증권시장을 통해 조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했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그동안 차관이나 금융자금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서 다시 말하면 정부에의 의존에서 벗어나서, 자본시장에서 일반국민을 상대로 자율적으로 소요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보다 앞서 이미 1968년부터 <자본시장육성법>을 제정, 공개기업에 대해서는 세재, 금용상 월등한 우대책까지 마련해 기업을 공개하도록 적극 권유했으나 그 실적은 극히 저조해, 1972년 말, 현재 공개법인은 55개에 지나지 않았다. 기업공개가 부진한 이유는 당시의 경제계의 대체적인 관념이, 개인이나 가족주의적인 폐쇄적인 경영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 재무부 기획관리실 법무관 시절

명분론으로는 공개할 수 없는 기업의 음성적인 비용지출이 많은 것과, 창업자 이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더 이상 기업공개를 지지부진하게 마냥 늦추면서 한없이 끌고 갈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적 강제를 동원해서라도, 유망기업을 국민적 대기업으로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것이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하게 된 그 배경이다. 그 당시 법무관으로서, 이 법 제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이 법이 제정되면 기업공개를 전담할 <증권2과>를 신설하기로 직제가 개정되고 있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 되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 내 전임자인 법무관의 수명이 평균 6개월에서 1년 미만이었다. 나는 2년 가까이나 이 자리에 있었으니, 이동 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다고 지레짐작을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부실기업정기경험이 있는데다가 공인회계사 자격까지 있으니, 새로 생기는 기업공개 업무를 다루는 ‘증권2과장’에 나는 천거되지 않겠는가 하고 우려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부실기업 정리업무에 너무 혼이 나고, 그 여파가 개인적으로 너무 컸기에 이것만은 피하는 것이 개인 신상에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당시 남덕우 장관께 단독 결재를 받는 자리에서 한 말씀 드렸다. 

“장관님, 제가 법무관으로 2년이나 되었으니 인사 관행으로 보아 불원간에 이동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어느 자리라도 좋으니 증권2과장만 피하게 해주십시오.”

“왜?”

“제가 부실기업 정리를 해보니까, 세상 무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업공개는 가장 힘이 있고, 영향력이 큰 우수 대기업부터 공개시켜야 하는데 장관님, 저같이 두려움을 아는 자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 일은 누가 해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그래도 장관님, 저는 좀 제외시켜주십시오.“
 
나는 당시 김용환 차관께도 똑같이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도리 없이 내가 예상하고 우려했던 초대 증권2과장으로 발령이 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었다. 재하자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이란 말도 있듯이, 일단 발령이 난 이상은 그것이 면류관이 아니라 십자가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경치 좋은데 정자까지 다 갖출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 당시 <맹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떠올렸다. 

물고기도 곰 발바닥도 바라는 바 /  魚我所欲也態掌亦我所欲也 
둘다 취할 수 없다면 /  二者不可得兼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리 /  舍魚而取態掌者也 
생도 의도 바라는 바 /  生亦我所欲也義亦我所欲也 
둘다 취할 수 없다면 /  二者不可得兼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 /  舍生而取義者也

그랬다. 맹자의 말처럼 소아적으로 내 사사로운 생과 안일만 취할 수는 없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런 일을 맡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일단 이 일을 맡은 이상은 최선을 다하자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가자는 각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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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공개심의회 발족 (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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