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심의회 발족 (50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우선 여기서 <기업공개촉진법>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겠다. 

재무부장관은 우수법인 중 공개 적격 법인을 선정해 <기업공개심의회의>의 의결을 거쳐 기업공개를 명하게 된다. 기업공개 명령을 받은 대상 법인은 그 지정 기한 내에 공개를 하면 조세상 여러 특전을 부여하되, 공개 명령을 받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 법인에 대해서는 조세상, 금융상 불이익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금융 면에서 재무부장관은 거래 은행에 대해 공개 불이행 법인에 대한 여신의 제한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 기업이 대체로 재무구조가 크게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기업공개촉진법>상 기업공개를 강제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이 금융상 제한을 가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그 당시는 어느 기업도 거래은행이 금융상 제재나 제한을 강할 경유에는 정상 경영을 해나갈 기업은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강력한 법이 공포 시행되고 나서, 경제계는 이를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여론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우수기업의 공개를 통한 자본시장의 육성과 내자조달의 기반 확충, 나아가 이러한 과정을 통한 세계적인 경쟁력 있는 거대한 국민기업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환영했으나,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지나친 강제를 통한 기업 의욕의 감퇴문제를 우려해 그 수단에 있어서는 강권 발동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도 강권발동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기업공개 자체가 기업에도 국가에도 국민전체에도 도움이 되는 만큼, 기업이 스스로 공개하도록 처음에는 권유하는 방향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이 같은 정부의 충정에 대해 오해했음인지 아니면 한갓 엄포로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나, 어느 기업도 공개를 준비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1973년 3월 22일 <기업공개심의회>를 발족시켰다. 정부는 심의회를 열고 대상법인 400여개 중 우선 110개 법인에 대해 4월 12일까지 재무재표 등 각종자료를 제출하도록 결정했다. 

이들 110개 법인의 선정기준은 첫째, 조정사채가 5억 원 이상이거나 둘째, 외자도입액이 500만 달러 이상 법인, 셋째, 외자도입법 규정에 의해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일정 금액 이상의 현금 차관이나 자본제 도입에 대한 인가를 받은 법인이거나, 조정사채가 1억 원 이상인 법인, 긍융여신이 10억 원 이상인 법인 중 2개 이상 요건에 해당하는 법인으로 했다. 

이 재무재표를 제출하지 않으면 <기업공개촉진법>에 의해 기업공개 대상이 된다는 것과 공개기업으로 지정이 되었을 때 불응하면 세재, 금융상 불이익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는데 노력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정부는 원칙적으로 기업공개를 강제 지정하는 것만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기업과 국가와 국민에게 서로 좋은 일인데, 서로 기분을 상해가면서 일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기업 스스로 자진 공개토록 유도했다.    

이 심의회의 결정이 발표된 후에 즉각적으로 유수한 기업인 대우실업이나 삼환기업, OB맥주 등 자본금 규모가 비교적 큰 10여 기업체가 신주를 공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제출 마감시한이 끝난 4월 13일에는 대상 기업 중 10개 업체가 자료를 제출했다. 

그와 함께 각 기업이 자진하여 기업을 공개하여, 1973년 6월 말에는 상장기업이 86개사가 되었다. 주식인구도 1년 전에 비교하면 두 배나 늘어나 주식공모 때는 100대 1을 넘는 수도 있었다. 이것은 일반 국민이 계나 사채놀이보다 증권투자가 낫다는 판단에서 나온 긍정적인 측면이 아닌가 한다. 
 
▲ 1973년경 가족들과

1973년 7월 20일에는 주식청약 때 청약자가 본인의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는 경우 발행규모에 따라 결정되는 기본 단위주식 10~50주 범위를 우선 배정토록 했다. 그 이유는 발행시장에서의 공모, 매출 때 가수요로 인한 지나치게 높은 청약경쟁을 예방하고, 영세 실수요자에게 주식이 더 많이 배정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이와 같이 우수기업체의 자진 공개와 증권인구의 확대에 힘입어 1973년 7월 23일 제2차 기업공개심의회를 개최했다. 선정 기준도 크게 낮추어 350개의 기업체에 재무재표를 8월말까지 제출토록 했다. 

1973년은 우리나라 증권시장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룩하는 해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기업공개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매월 평균 5, 6개 사가 기업을 공개하게 되어 그 당시 신문에는 공개 회사의 내용과 청약사항과 청약결과가 연일 지상을 장식하게 되었다. 

전년도인 1972년도에는 정부가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공개 회사가 7개 회사에, 공모를 통한 기업자금 조달액은 11억 원에 불과했는데, 1973년 중에는 무려 47개사가 공개되고, 자금 조달액도 215억 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에도 이 같은 분위기와 추세가 꾸준히 이어져 오늘의 증권시장 상장회사는 700여사에 이르고, 주식 인구도 200만에 이르고 있는, 전 세계의 투자자의 관심을 갖는 시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게 되자 기업도 정부의 강제 공개가 문제가 아니라 차관이나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기업공개가 손쉽게 자금조달을 할 수 있는 길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기업의 대외선전과 프리미엄을 통한 창업자 이득의 보호는 물론, 대국민 이미지 쇄신과 신용도 제고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다투어 기업공개를 하겠다고 덤벼들었고, 심지어 공개자격이 없는 비우수기업마저 공개를 하겠다고 해 이를 막느라 진땀을 빼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이렇게 기업공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공모주가 선전문제였다. 증권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회사에 대해서는 시장가격이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격을 기준으로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처음으로 상장하는 기업의 주가를 얼마로 매기느냐가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업인들의 기업공개를 꺼렸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창업자 이득의 보호문제였다. 이런 측면을 강조하면 주가는 다소 여유가 있어야 하고, 투자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들의 이득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는 다소 주가는 보수적으로 책정되어야 한다는 이율배반성을 안고 있었다. 

만약 주가를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지나치게 낮게 책정한다면 기존의 주주들은 그동안에 기업을 창업해서 오늘날까지 키워온 ‘땀값’을 보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기업공개 자체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사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업의 알맹이를 빼돌리고 빈껍데기만 공개하는 풍토마저 조성될 우려가 있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투자자 보호가 아니라 투자자의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창업자 이득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는 주가에 적정 프리미엄을 붙여주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직접 프리미어의 산출 근거가 무엇이며, 그 창업 이득이 반드시 기존 대주주들만의 것이냐, 정부의 온갖 지원과 국민적 희생위에 그 기업이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하여 그 창업자 이득을 소수 대주주만이 향유해야 하는 것이냐 등이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제3자 입장에서 이러쿵저러쿵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만, 책임 있는 정책당국자는 그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결론을 내야만 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한정 미루고 피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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