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적인 저축운동 전개 (51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여기서 한번쯤 과연 주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겠다. 

주가란 순수 이론 쪽으로는, 투자자가 그 주식을 매입했을 때 장래 이득에 대한 현실가치에로의 환원한 가치를 나타낸다 라고 어렵게 표현할 수 있다. 주식에 대한 장래 이득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 기업 영업활동을 해 얻은 결과인 순 이익으로부터의 배당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업 전망에 대한 종합예측과 증권시장에서의 수요 공급세력의 복합적 작용에 의한 경쟁적 주가 형성으로부터 나오는 자본소득(Capital Gain)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론적으로는 시장가격이 형성되기 전의 주식가격이란 당해 기업에 대한 장래 수익 전망에 대한 예측 가격인데, 그것을 전문용어로는 수익가치라고 한다. 이 예측이란 상당히 어렵고 이해 당사자의 자의성이 개재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과거 몇 년간의 그 기업의 경영실적을 반영한 것을 주가로 나타낸 것인데, 자산가치라고 한다. 이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엄격히 말하면 주가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에 아무리 이익을 많이 내고 실적이 좋은 기업이라 해도, 그 기업이 사양산업 등 여러 이유로 앞날의 전망이 어두우면 그 주식의 가치는 극히 낮을 것이고, 반대로 과거에 영업실적이 좋지 않아서 적자가 누적되어 있다 해도 장래 전망이 아주 좋으면 프리미엄도 붙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히 논의해 결론을 내렸다. 과거 실적인 자산가치를 반 반영하고, 장래 예측인 수익가치를 반 반영해, 즉 자산가치 + 수익가치 × 1/2로 주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것도 엄격한 공인회계사 감사를 통해 과거 5년간의 평균 실적을 분석해 그 결과를 첨부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도록 규정화ㆍ제도화 했다. 

당시 공개기업 중에는 그 우수도에 따라 프리미엄이 0~200%까지 붙어서 공모가 되었고, 프리미엄이 높은 기업은 오히려 청약률도 높은 현상까지 초래되었다. 투자자들이 장래 전망을 좋게 본 때문이라 본다. 

한편 프리미엄의 성격에 대해 한마디 더 설명해야겠다. 공모주식의 프리미엄은 구 주주의 이득과과는 관계없이 액면가액과 더불어 기업에 들어가서 자본잉여금에 계상이 되고, 그것은 사내에 유보되어 기업자금으로 활용되고, 동시에 신ㆍ구주주 공히 청구권으로 남는 것이다. 설사 프리미엄이 다소 높이 책정된다 해도 기업과 신ㆍ구주주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프리미엄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고 프리미엄이 붙은 기업에 대한 세무서 신고소득과 기업공개 제출 소득의 차이까지 분석보도 되었다. 명확한 성격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라 믿는다. 한편에서는 프리미엄을 더 붙여 받기 위한 기업의 노력과 당대의 유력한 권세 등을 통한 압력도 만만치 않아 피곤하게 만들었다. 

내가 증권2과장에 임명되기 전의 우려와 걱정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황희(黃喜) 정승과 율곡 이이 선생을 생각했다. 영상(領相)을 지내면서도 방안에는 멍석을 깔고 집이 새어 방안에서도 우산을 썼다는 황방촌(黃尨村)! 호판(戶判), 이판(吏判), 형판(型判), 병판(兵判) 등 판서직을 두로 지냈지만 만년에 가난하여 친구의 수의를 빌려 입고 북망산을 갔다는 이이(李珥)! 그렇다!

'추위를 이기는 저 송백의 절조는 군자가 모름지기 취할 바가 아니던가!'
 
▲ 증권과장 당시 저축운동을 전개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옛날 중학을 못가고 고향마을 서당에서 배우고, 익혔던 옛 어른들의 훌륭한 언행을 항상 기억하고, 어려울 때마다 좋은 정신적 지주로 삼아왔다. 우리가 아차 실수해 한번 오명을 뒤집어 쓰면 만고에 흐르는 큰 강물을 다해도 그것을 씻어낼 수 없다는 진리를 머리에 간직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기업공개 업무가 소기의 궤도에 오르자 나는 1973년 8월 31일 이재국(理財局) 이재2과장으로 영전이 되었다. 이재2과는 주로 시중은행 담당이었다. 나는 이 보직을 받자마자 증권2과장 시절의 부실기업의 정리에 따른, 그 고달픈 시절의 기억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새 일에 전념했다. 

나는 두 가지 일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하나는 국민저축의식의 고취를 위한 대대적인 저축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투자자금을 외자 차입에 의존하는 것을 줄이고, 내자로 충당하는 비율을 증대시켜 궁극적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다져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의 저축의식의 고취가 무엇보다도 필요불가결했기 때문이었다. 

<저축추진위원회>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그 기능을 활성화시켜서 저축표어와 저축수기 등을 공모하고, 저축영화도 만들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국민저축운동을 전개했다. 

<저축의 날> 기념식도 장충체육관에서 7천여 명의 전국 금융인이 모여, 최대 규모의 행사를 하면서 모든 금융인이 심기일전 내자 동원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전국방방곡곡에 저축을 장려하는 표어가 나붙었고, 서울에는 곳곳에 대형 아치가 세워지고, 이와 같은 분위기를 새마을운동과 연계시키도록 했다. 

이 같은 시류에 호응하기 위해 금융인의 자세와 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새마을 연수의 발상지인 경기도 고양에 있는 농협 연수원과 협조, 금융인의 새마을 연수계획을 수립 시행했다. 1주일 단위로 합숙을 시켜 전국 금융인에게 새마을 연수를 시켰다. 이것이 오늘의 <금용연수원>으로 발전했다. 

또 역점을 두었던 것은 금융업무의 현대화와 전산화추진이었다. 경제는 발전하고 그에 따른 금융거래량과 규모는 날로 늘어나는데, 그 업무 형태와 관행은 구태의연한 그대로였다. 

이어 국제금융업무는 전산화와 온라인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세계가 하나로 되어가고 있었다. 뒤 늦게나마 <은행집회소> 건물에 <금융기관전산화추진본부>가 설치되었고, 본격적인 작업이 착수되었다. 

온라인이란 용어도 그 당시에는 생소했는데, 오늘날의 온라인 시스템을 통한 금융업무의 발전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금융국제화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달성해야 할 큰 과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1973년 12월 31일자로 제정 공포된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제정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 당시 <한국감정원>의 은행담보물 감정과 관련해 이 법을 새로 만들려고 추진 중이었다. 그런데 추진과정에서 기존의 토지평가사 업무와 일부 경합되는 부분이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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