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연수차 태평양을 건너 뛰고 (52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1973년의 중동전쟁으로 유류파동을 겪은 우리는 1974년을 맞이했다. 이 1974년은 희비가 엇갈리는 8.15를 보낸 해다. 장충단 실내 체육관에서 8.15경축행사를 거행하던 도중 문세광(文世光)에 의햔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흉탄을 빗나가 오히려 배석했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가 피살되었다. 

온 국민이 경악하고 분노에 떨던 이날, 지하철 1호선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운명의 장난인가? 한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또 한눈에서는 웃음이 넘쳐흐르는, 이 짓궂은 운명의 장난! 참으로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 희비쌍주(喜悲雙奏)의 날이었다.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행운의 해이기도 했다. 그것은 IMF 국제통화기금 초청으로 그곳에서 <금융전책과정> 연수차 도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수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특별연수 과정이었다. 물론 선발고사에 합격해야 하고, 그것도 국가별로 1명밖에 배정이 안 되었다. 

6개월 코스였지만, 본인은 물론 부부동반으로 초청했으며, 끝나면 약 1개월 간의 유렵여행도 가능한, 그 당시로서는 실로 황금코스였다. 내 개인으로 봐서는 실로 영광된 연수였지만, 그 반면 어깨가 무거웠다. 세계 25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받는 연수라, 나 개인의 자격이 아닌 한국이라는 나라를 대포하고 있다는 의식이 앞섰기 때문이다. 

나는 내자와 더불어 세계의 큰 바다 태평양을 건너 날며 만감이 교차되었다. 첩첩산중인 허굴산의 바람소리를 듣던 내가 태평양의 파도소리를 딛고, 이제 바야흐로 전개될 국제무대를 향한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장도에 올랐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고 약간의 흥분마저 느껴졌다. 

막상 미국에 도착하여 연수를 받자, 히어링(hearing)에 곤란을 느꼈다. 한국과 월남 등 몇 나라를 빼고는 대부분이 영어 사용국에서 왔기 때문에 강의 등 모든 것이 미국 내국인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강의는 경제이론과 통화금융정책 등의 수리적 분석, 각국의 경제개발전략과 경제개발에 성공한 사례 등 다양하였다. 우선은 그 전날 배포된 자료를 읽어서 소화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 대표들과 대화를 하거나 좌담을 해보면 영어사용국 참가자가 너무 빨리 지껄여대고 떠들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내가 참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령 내가 뭐 좀 이야기 하려 들면, 중간에 끼어들어 정신없이 떠드는 이들이 있어 사람을 주눅이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창피는 고사하고 실로 땀을 뺄 일이었다. 나라 체면도 있고 지지 않으려는 내 패기로도 결코 거기서 호락호락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침내 내 지혜의 샘물에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건져 올렸다. 

어느 금요일이었다. 우리는 금요일까지 정상 강의가 있었고, 주말에는 관광을 시켜주거나 각자 휴가를 즐기는 것이었다. 그날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7개국 참가자와 그 부인들을 초청했다. 워싱턴에서 일식을 경영하고 있는 우리 교포의 음식점으로 초대했다. 

순 한국식으로 식사범절과 술 마시는 예법을 가르쳐주기로 하고 그날만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코리안 스타일’로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예컨대 식탁 앞에 주저앉는 법, 수저 쥐는 법, 음식을 먹는 법, 술잔을 돌리는 법 등 그 일체를 순 한국식으로 하게 했다. 

이런 소개와 설명을 내가 하고 내가 지도하니 그들도 별수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종전과 같이 내 말을 듣고 우우 떠들거나 이탈하지 않았다. 주로 내가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만 신기하게 배우고 웃고 따라하느라 자기들끼리 말할 여유도 없었고, 그런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전히 우리 부부가 좌중을 주도하게 되었다. 
 
▲ IMF 근무 당시 회원국 대표들과 / 앞줄(앉은) 오른쪽이 필자이고, 바로 뒤가 아내이다 

파티의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모든 관심은 나에게로 집중되어갔다. 약주 잔이 내 앞에 마치 열병식을 하듯 늘어섰다. 이들의 콧대를 싹 꺾어놓은 나는 그 술을 흐트러지지 않고 여유 있게 마셨다. 취홍이 도도해지며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 통일이여 오라

나는 맨 먼저 이 가사 내용을 영어로 그들에게 번역해주고는, 우리말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청을 높여 불렀다. 장내가 쩡쩡 울렸다. 노래가 끝나자 식당이 떠나가라 박수소리가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내 노래를 듣더니 분단된 독일의 참가자가 자기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노래를 염원하는 노래가 있다며 불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각기 자기 나라로 민요를 불렀다. 민요는 대개 세계 각국에까지 퍼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자연히 코러스가 되었다. 

앙상블이 제대로 안되었지만, 우리는 신들린 사람처럼 여러 민요를 불렀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 만국공통의 예술이란 걸 피부로 강하게 의식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날 밤 우리의 전통 풍속, 우리의 음식문화를 그들에게 자랑했다는 자긍심에 코허리가 시큰했다. 

특히 내가 부른 <우리의 소원>은 여러 빛깔의 의미를 그들에게 던져주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개발도상국으로 세계의 각광을 받고 있는 한국이지만, 분단의 서러움을 짓찧고 있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반면 우리는 유구한 3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를 간직했다는 강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사실 미국만 해도 그러하지 않은가. 역사가 그리 길지 못하기 때문에 <통나무집>이 기념물로 보존될 정도가 아닌가. 그렇게 보면 우리의 서울거리나 경주 구석구석에, 그 옛날 찬란히 꽃피웠던 문화의 자취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나는 술이 취했지만, 우리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탄 인도의 시성이 일제의 정책에 시달림을 받던 우리 국민들에게 중, 격려 시 한 토막을 입으로 되뇌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들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엔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누가 내가 읊은 이 시의 뜻을 알아주랴마는, 나는 작은 소리로 몇 번이나 읊조렸다. 누구나 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나는 그날 밤 내가 이고 사는 하늘과 내가 마시던 샘물을 눈이 아리도록 그리워했다. 

이스라엘은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아랍이지만, 그들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전신을 휘감는 ‘차도르’를 결코 벗어던지지 않는다. 나라를 잃고 천하를 유리방황했으나 언어와 전통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 만에 조국을 되찾았다. 

‘그렇다! 우리말을 쓰자. 공용 이외에는 우리의 풍속과 우리의 언어를 쓰자. 그것이 조국과 겨레를 세계에 심은 길이다.’

우리는 각국 대표들과 민요 ‘아리랑’을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거리에 나섰다. 학창시절 고연전(高延戰)이 끝나면 스크럼을 짜고 서울 거리를 누비던 것을 흉내 낸 것이었다. 식당에서 아파트까지는 1km쯤 되었지만 소리 높여 각국의 민요를 부르며 활보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미국 시민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마침 그 다음날이 주말휴가라 우리는 2차까지 가 젊음이 기개를 여지없이 발산했다. 이것 또한 우리 주당(酒黨)문화를 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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