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자송금제도 개선한 외국인 투자담당관으로 (53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이 일이 있은 뒤부터는 각국 참가자들의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내 존재를 모두 인식해주었고, 내가 말하려 하면 기다리며 경청해주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휩싸여 즐겁고 보람 있는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당초 계획대로 한 달 동안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앞에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내자를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범국민적 저축증대운동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여기에 우리 경제 개발의 사활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 경제학자 군나르 미르담(Karl Gunnar Myrdal)은 개도국은 금리를 대폭 인상하여 자금의 이용을 비생산적 부문에서 생산적 부문으로 유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만은 1949년 3월 금리 현실화를 단행하여 1내지 3개월 만기의 특별우대예금을 신설하여 월 7%의 연복리 125% 사채금리 200% 내외의 미증유의 고금리를 채택하였는데, 그 후 예금이 크게 증가하고 물가가 안정되면서 점진적으로 금리를 인하하였다. 

우리나라도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고도성장을 위한 과감한 경제시책들을 실시하였는데 이중 통화정책금융 면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조치가 1965년 9월말에 단행된 금리현실화 조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은행의 대출최고금리가 종전의 연 16%에서 연 26%로 인상되고 특히 예금금리는 종전의 연 15%에서 연 30%로 두 배로 인상되었다. 

금리 현실화조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금융기관 금리를 시중 실세 금리수준으로 대폭 인상함과 동시에 예금금리를 대출금리보다 높게 책정함으로써 은행으로서는 역마진이 발생한 점인데, 이 조치의 1차적인 목적이 내자동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의 수행을 위한 막대한 투자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 저축의 증대가 가장 중요한 현안과제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민간의 자발적 저축을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종전 금융기관 금리수준은 물가상승률이나 시중 실세 금리를 반영하는 국채이회율과 사채금리에 비해 턱없이 낮아 은행의 저축을 목적으로 예금할 유인이 없었다. 

금리현실화 조치의 효과를 간추려 보면 먼저, 저축성예금의 증대를 들 수 있다. 저축성예금은 1966년에 전년비 123%, 1967년에 84%의 대폭적인 증가를 보였다. 특히 가계의 저축성예금 증가가 현저하였는데, 이는 사채시장이나 부동산 투자 등으로 유입되던 자금의 상당 부분이 금융기관 저축으로 흡수된 것을 뜻한다. 

이러한 금융저축의 증대와 더불어 국민계정상의 민간 실질 저축도 크게 증가하였다. 물가 증가세도 둔화되었다. 다만 국내 고금리는 내외 금리차를 확대시켜 외자 유입을 촉진시키는 유인으로 작용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금리현실화 조치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국세청의 발족과 조세행정의 강화로 재정수지의 균형달성, 관민합동의 강력한 저축추진운동 등 당시의 유리한 경제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다. 

그 후 경제가 안정되고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가 요청되면서 점진적으로 금리를 인하한 것은 금리정책의 탄력적 운용이라는 관점에서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지금은 물가가 안정된 데다가 저성장에 투자부진, 일부 대기업의 과다한 사내 유보금 보유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한 초저금리시대여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 각국의 IMF 대표들과 함께 / 앞줄(앉은) 왼쪽에서 2번째가 필자이고, 바로 뒤가 아내이다

1975년, 내 나이 37세였다. 나는 귀국하자마자 그해 10월 5일 <외국인투자담당관>이 되었다. 이것은 실로 남우세스러운 좌천이었다. 대체로 그 자리는 사무관이 승진하여 처음 가는 자리였다, 

내가 왜 하필이면 이런 자리로 좌천되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여행 중에 무슨 오해가 생겼는지, 아니면 부실기업 정리나 기업공개 작업 등에서 오해가 생겼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주구갱(走拘羹)’의 신세가 되었다고 개탄했다. 

죽자 사자 일생동안 사냥을 한 개가 끝내는 그 주인의 보신탕국거리로 죽어야 한다는 비정이 나를 매정하게 짓찧었다. 온갖 원성과 모략의 소지가 있는 부실기업 정비나 기업공개의 현장에서 그렇게도 사명감에 불타 밤낮없이 뛰었고 이제 한두 자리 적절한 자리에서 몇 년만 잘하면 국장 승진이다 싶었는데, 경쟁사회에서는 조그만 티도 크게 운명을 좌우하는 법인데, 이 시점에서 그렇게 되다니! 

기가 막혔다. 나를 아끼던 분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아무리 옥을 진흙속에 묻어도 옥은 옥이며,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고, 찬란한 진주는 병든 조개 속에서 그 부피가 는다는 진리를 좇기로 했다. 

중국 <사기(史記)>에 나오는 다음의 명언을 떠받들고 주어진 과업에만 정진했다.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그 꽃이 아름답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그 꽃을 구경하러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나무 아래엔 저절로 길이 난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그렇다! 길가에 집을 짓는 작사도방(作舍道傍)처럼, 곁 사람들의 용훼(容喙)에 흔들리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지성으로 내 길을 가자. 아무리 한직이라 해도 국가가 필요로 해서 만든 자리이니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때 외국인 투자자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은 자기 소유의 주식을 팔거나 배당이익금을 송금하는 것을 허가하는 업무가 주종을 이루었다. 서기관급 담당관이 최종 결재해서 수백만 불, 수천만 불이 해외로 송금되고 있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회계원칙에 의해 정확히 계산되지 못한 송금액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벌어들인 외화인데, 어떻게 아무 기준도 없이 송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기업회계 원칙에 따라 정확히 송금액을 계산하도록 했다. 길을 두고 차마 메[山]로 갈수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또 말썽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안하던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인사불만을 가지고 일부러 말썽을 부리고 있다는 엉뚱한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사면초가의 입장이 되어 공인회계사회와 한국회계학회에 질의서를 제출했다. 과연 나의 처리과정이 잘못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관께 다시 진언을 했다. 

“장관님, 우리 한국인이 외국에서 본국에 송금을 할 때는 반드시 국제적으로 안정된 회계원칙의 적용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외국인도 의당 이 원칙에 따라야만 할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남편이 번 돈을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거와 마찬가지로, 하물며 우리가 피땀 흘려 번 외화이기에 정당하게 송금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지금 공인회계사회와 한국회계학회에다 질의를 했는데, 그 회답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듣자 장관께서는 깜짝 놀라셨다. 이런 구멍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대외 송금허가문제는 절차를 갖추는 단순한 업무로만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 발견은 회계원칙에 입각한 고도의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외국인송금허가업무를 다시 한 차원 다른 정상궤도에 올려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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