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부 국고국장으로 승진 (54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이런 공정이 인식되었는지, 나는 6개월 만에 국제금융외화자금 과장으로 영전이 되었다. 1976년 2월 10일이었다. 

“외 심은 데 외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옛 성현의 말이 한 치의 오류가 없다는 것을 외국인투자담당관을 그만두면서 실감했다. 

왜냐하면 나는 외화자금과장직을 맡았지만, 그때부터 외국인투자 담당관의 외자송금허가 업무는 내 협조 사인을 받도록 장관 직권으로 조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업무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고, 개선된 업무가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잠정적 조치였음이 분명했다. 그 뒤 직제 개편이 있었는데, 이 외화송금 업무를 외화자금과에다 숫제 통합시켜 버렸다. 

내가 이 외화자금과에서 근무할 때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일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의 수단에다가 우리의 총영사관을 개설한 것이다. 그때 북한은 이미 10년 전부터 외교관계를 맺고 수단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전후(戰後) 8차에 걸쳐 노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수단과의 총영사관 개설을 교섭하기 위한 관민사절단을 구성했다. 그때 사절단장은 민병권(閔丙權) 무임소장관이었고,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과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한 관계부처 공무원들로 구성되었다. 나는 그때 재무부를 대표해서 그 일원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사우디로 갔다. 거기서 극비리에 전세기를 타고 수단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수단 정무장관이 나와 따뜻하게 영접해주었다. 북한 측을 의식했음인지 수단 측의 정무장관은 모든 것을 자기들이 책임진다며 안심하라고 했다. 

우리는 공항에서 영빈관으로 향했다. 영빈관이라야 에어컨도 없는 그런 건물이었지만, 식사만은 일류 양식이 나왔다. 여장을 푼 우리는 수단 측과 만찬을 겸해 총영사관 개설에 대한 대체적인 합의를 글어냈다. 다음날 우리는 대통령궁을 예방하여 뉴메리 대통령을 만났다. 그것은 간밤에 이미 합의된 총영사관을 개설을 확인하는 의례적인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서 수단국을 위해 영빈관 신축과 타이어공장 건설 등 상호 협력방안이 최종 합의되었고, 오래 끌어오던 총영사관 개설 외교문제가 해결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이 났다. 우리는 귀국에 앞서 간단한 자축의 축배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국내외적으로 세월은 흘렀다. 1975년에는 월남이 패망하여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1976년에 판문점에서 <8.8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해가 바뀌어 1977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 해는 우리의 수출이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달성한 감격적인 해이다. 절대 빈곤을 타파하고, 100억 달러를 달성한 감격적인 해이다. 절대빈곤을 타파하고, 100억 달러의 수출국이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의 해였다. 나는 이 해에 39세가 되며, 2월 16일에는 증권제1과장이 된다. 이 증권제1과장은 증권보험국의 주무과장이었다. 

그동안 증권시장은 1973년도에 <기업공개촉진법>에 의해 본격적으로 기업공개를 추진한 것에 힘입어 상장회사도 300여개가 되었고, 주식투자 인구도 100만을 넘어섰으며, 그 거래량도 엄청나게 늘어나서 세계 각국의 투자자가 관심을 갖고 개방 압력을 가해 올 정도로 변모해있었다. 불과 4년여 사이에 일어난 변모였다. 

나는 4년 전에 기업공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시장에 물건을 많이 내어놓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에 따라 물건이 엄청나게 늘어난 큰 시장, 즉 유통시장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증권시장과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렇게 커진 증권시장을 어떻게 잘 관리해서 국민의 건전한 투자시장과 명실상부한 내자동원 기능을 담당하는 자본시장으로 발돋움 시키고 앞으로의 국제화에 대비하느냐에 있었다. 소위 일본의 <노무라[野村]증권사건>처럼, 우리의 자본시장에도 이른바 ‘큰손’이 나타나,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리고, 주가를 조직하여 유통질서를 문란케 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건전한 투자자 특히 소액투자자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 증권감독원 개원 / 오른쪽에서 2번째가 필자이다

이처럼 커진 증권시장으로 불공정거래, 불공정시세, 기타 부당행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국제화에 앞선 선결과제가 되었다.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SEC)>란 강력한 기구가 있어서 이 같은 불공정거래 행위나 비리들에 단호히 대처하는, 소위사법권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재무장관 산하에 이 같은 강력한 기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우리는 특별법 제정보다는 <증권거래법>을 개정해서 <증권관리위원회>와 그 집행기구로서의 <증권감독원>을 창설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우리도 이 기구에 미국처럼 강력한 사법권을 부여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여러 사정도 있고 해서 후일의 과제로 미루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실행을 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증권시장에 대한 기본정책의 수립과 시행을 제외한, 상당한 분량의 책임과 권한은 물론 사법권까지 고려한 기능을 이들 기구에 부여함으로써 <증권관리위원회>와 <증권감독원>은 명실상부한 증권시장에 대한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자본시장 개방과 국제화 등에 앞선 과제라 생각된다. 

앞으로 이에 대비한 자본시장에 관련된 제도와 조직이 정비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 가는 것과 병행해서, 우리는 자본시장의 국제화에 대비한 연구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다른 나라의 경험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증권관계 전문가를 포함한 7명으로 조사단을 구성했는데, 내가 그 인솔책임자가 되었다. 

대상지는 미국과 일본과 브라질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은 성공한 사례, 브라질은 실패한 사례이며, 미국의 경우는 장외시장 제도에 관한 것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조사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건의했다. 

첫째, 장외시장은 우리나라로서는 시기상조이다. 
둘째, 자본시장 국제화는 일본과 브라질의 경험을 대조적으로 분석 연구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다만 국제화에 앞서 그 1단계로 외국인전용 투자기금 같은 것을 창설해 운용함으로써 경험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에게도 하나의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국장급으로의 승진의 문제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나에게도 그 승진의 기호가 주어졌다. 그것도 두 번이나 주어졌다. 

독일 주재 재무관으로 나가라. 전매청 국장으로 나가라. 

나는 이 기회를 모두 사양했다. 솔직해 말해서 나는 혈연, 지연, 학연 등 소위 세상이 말하는 배경에 대해서는 대단히 취약했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면 이것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성격상 이것이 잘 안되었다. 세상에 어느 상사치고 고분고분 말만 잘 듣고 겸손하고 아부가 아니라 예의로서 잘 찾아다니면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처음부터 되먹은 품이 이것이 잘 안되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상하게 실천이 잘 안되었다. 굳이 변명을 한다면, 열심히 신명을 바쳐 일하는 것이 상사를 위하는 것이 아닌가. 일을 통해 상사가 빛이 나고 잘 된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그러나 실제로 살다보니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고 일이 잘되면 윗분들이 빛이 나서 좋아하면서도,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혹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갖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견제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인심이 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나는 항상 고독하고 허전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일이 잘되고 성공적인 평가가 있으면 있을수록,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고독했다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아, 이 무서운 이율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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