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 길에 들은 <10.26사건> (55회)
  제7장 재무부에 바친 청춘의 열풍

어수선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해외나 외청으로 승진해나간다면 그야말로 ‘함흥차사’나 ‘강원도 포수’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전인수 격인 해석인지는 몰라도, 내 보기에 본부에서 고생 없이 업무를 하면서도 국장이 되는 사람이 많았고, 나 자신의 정책도 본부에서 정책적이고 창조적인 업무를 해야지, 절차적으로 집행적인 업무에 전혀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두 번 다 승진기회를 마다하고 본부에 있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나를 곱게 보아주지 않았다. 야릇한 색안경으로 보았고, 나무라는 경향도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두 번이나 거절했으니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후배가 앞질러 승진이 되었다. 그것도 본부에서 말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불가피한 사유가 있겠지 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더더욱 고독해져갔고 본부는 물론 산하기관 사람들까지 나와의 접촉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합천 산골 촌놈으로서, ‘재무부 박 국장!’이란 호칭을 한번 들으면 더 이상의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참기로 하고 기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번 밥상을 받고도 공무로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게 하지 않고, 열 번 일어나 일을 처리한다. 괴롭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기죽지 않고 항상 기쁜 마음을 간직해야 하고, 반대로 모든 일이 잘되어 뜻을 이루고 있을 때는 언젠가는 실의에 빠져 비운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어려울 때 기죽지 말고, 좋은 때 자만하지 말라는 천하명인이라 생각한다.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한 말로 그때의 내 좌우명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실로 구세주가 나타났다. 천만 뜻밖에도 당시 김원기(金元基) 산업은행 총재께서 재무부장관으로 부임해오셨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내게 벌여졌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분은 고려대의 내 선배였고, 저간의 내 사정을 듣고 익히 듣고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인연 있는 분에게 괴로움을 드리거나 기대려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다만 원칙대로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느끼는 일이지만, 세상에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은가. 투자는 아무래 했어도 보상은커녕 손해를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경우를 우리는 일컬어 불운이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원칙대로 될 수 있고, 자기의 처지가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을 만난다는 것은 당연한 것 일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상황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나 운이 돌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본부에서 국고국장으로 발령이 되었다. 그때가 1979년 5월 23일이었다. 내 나이 41세 때였다. 참으로 얼마나 기다리고 소망했던 일인가! 마치 오랜 수행을 쌓은 용이 승천하는 그러했을까! 나는 그 기쁨을 가눌 길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교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지만, 승진이 안 되어 고심하고 있을 때는 ‘재무부 국장 소리 한번 듣고 나면 그만두어도 좋다’라고 생각했다. 막상 그 국장이 되고나니 또 다른 욕심이 생기다니! 재무부 국장급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재국장’을 한번 하고 ‘재무부차관보’로 승진하는 새로운 목표가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속된 말로 화장실에 갈 때와 화장실을 다녀온 뒤의 마음이 각각 다르다더니, 아, 인간은 이렇게도 용렬한 것일까? 아무튼 군대로 말하면 ‘별’을 달았으니 이제 나는 덕도 좀 쌓고 인간관계도 개선하고, 지금까지 큰 일들을 하느라 본의 아니게 내게 내려진 인식도 개선하면서, 내 주변에 밝은 바람을 일으켜보리라고 다짐했다.  
 
▲ 재무부 시절 / 맨 오른쪽이 필자이다

웬만한 실무는 과장들에게 맡기고, 나는 사람들이나 열심히 만나서 새로운 차원의 인생행로를 개척해가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다.
 
나는 소위 재무부의 수석국장인 국고국장 자리를 맡아 예산의 집행과 구가 재산의 관리라는 이른바 나라살림의 ‘열쇠’를 쥐게 된 셈이었다. 예로부터 사가(私家)에서도 광이나 뒤주의 열쇠를 찬 주부의 손끝에서 살림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하물며 나라의 ‘광’이라 할 수 있는 국고 자금의 집행은 예산 편성 시에 이미 그 방향이 정해졌다 하더라도, 세입 세출의 합리적 운영과 시기 선택 여하에 따라 국가재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 살림의 규모를, 어떻게, 어느 규모로, 어느 시기에 운용하느냐에 따라 그 돈줄의 흐름이 달라지고 국민경제와 국민생활에 지대한 작용을 하게 된다. 나는 그 열쇠의 관리에 신경을 썼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열쇠를 결코 헤프게 쓰지 않았다. 녹슬지 않게 평소에 닦고 또 닦았다. 

그러는 사이 1979년도 저물어갔다. 10월 27일의 꼭두새벽이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을 나섰다. 아침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새벽 4시 반만 되면 집을 나가 아침운동을 여러 해 동안 계속하고 있었다. 맑은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전신의 피가 기지개를 쳐, 그날 하루의 활력소를 공급해주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날도 이 아침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새로운 생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상쾌한 아침이었다. 오늘 하루도 묵을 피로를 씻고, 유쾌한 마음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얼마 안가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침 일찍 문을 열어놓은 가게에서 꽝꽝 울려 퍼지는 뉴스가 일시에 신경을 긴장시키고 얼어붙게 하고 말았다. 간밤에 일어난 <10.26사건>과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삽교천의 제방준공식에 다녀온 것이 바로 어제인데, 그 대통령이 하룻밤 사이에 서거했다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 돌발사고였다. 

‘사생유명(私生有命)이요 부귀재천(富貴在天)’이라는 공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국가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저 3.8선 너머 북한의 동향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줄기차게 추진해온 경제발전을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내 머릿속은 일대 혼선이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 안은 실로 용광로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혼란과 혼란의 소용돌이였다. 국민들은 이 와중에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이렇게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일부 몰지각한 군상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나팔을 불어댔다. 이 정권으로부터 가장 혜택 받고 가장 선택받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표변하여 유신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재무부 국고국장으로 승진 (54회)
  시류에 편승하는 군상들 (56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