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편승하는 군상들 (56회)
  제8장 정치의 회오리 속에서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반죽이 좋게 쌍지팡이를 짚고 나선 그들이, 하루아침에 군부독재와 부조리와 부패를 천연덕스럽게 입술에 걸고 나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실로 목불인견이었다. 이런 군상들의 비정과 시류에 약삭빠르게 편승하는 승부근성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환멸의 비례로 그들이 오히려 측은하게까지 느껴졌다 그 당시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이솝의 우화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어느 때 새들과 짐승들이 두 패로 갈려서 심하게 싸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짐승 편에는 곰이나 호랑이나 사자 같은 사나운 동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새 편에도 독수리나 매 같은 날쌔고도 사나운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짐승들은 무섭고 사납기는 해도 새들은 날개가 있어서 위험하면 훌쩍 하늘로 날아올라 도망을 가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은 좀처럼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새 편이 틀림없이 이길 것 같다가 금방 사나운 짐승들에게 쫓기는가하면, 어떤 때는 짐승들이 이길 것 같다가 새한테 쪼여 도망을 쳤다. 그런데 이들의 싸움이 벌어지자 이 싸움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박쥐 한 마리가 있었다. 박쥐는 이 싸움에서 새 편이 이길 것 같으면 유리한 새 편으로 가서 해롱거리며 알랑방귀를 뀌었다. 

“호호호. 나도 너희들과 같은 새란다. 이봐. 날개가 있지? 나도 니네들처럼 하늘을 날수 있어. 그러니까 나도 니네편이야. 니네들 도와줄게.”

박쥐는 이렇게 아양을 떨고는 새 편을 도와주는 척했다. 그러다가 전세가 짐승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지면 이번에는 표변하여 짐승들을 찾아갔다.  

“흐흐흐 나는 니네들과 같은 짐승이란다. 얼굴 생김새나 몸이 쥐와 꼭 같지 않니? 그러니 니네 편이야. 나도 니네들 도와서 같이 싸워줄게.”

이렇게 말한 박쥐는 다시 짐승들을 도와서 싸우는 척했다. 박쥐는 이처럼 전세가 유리한 쪽만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고 아양을 떠느라 몹시 바빴다. 그러면서도 박쥐는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흐흐흐 내가 얼마나 약삭빠르고 영리하데. 새가 이기든 짐승들이 이기든 난 언제나 이긴 편이 되거든. 나보다 더 영리한 동물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지! 흐흐흐.”

그런데 몇날 며칠을 두고 싸워도 그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양쪽은 이제 싸움에 지쳐서 싸울 기력조차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양측은 마침내 싸움을 그만두고 화해를 해버렸다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박쥐는 새들을 찾아갔다. 새들이 깜짝 놀라며 박쥐를 비아냥거렸다. 

“아니 박쥐야. 넌 짐승이 아니냐? 새들인 우리에게 뭣하러 왔니?”

이렇게 외면을 당한 박쥐는 이번에는 짐승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박쥐는 짐승들에게도 핀잔을 맞았다. 

“아니 박쥐야. 넌 새라면서 짐승인 우리에겐 뭐하러 왔니?”

이렇게 새들과 짐승들을 양쪽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자 박쥐는 그만 외톨박이가 되고 말았다. 어두운 곳에서 언제까지나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는 이런 박쥐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런 어려운 시기에 내가 맡은 일이나마 성심성의껏 다짐했다. 사실 나라가 어려운 때일수록 공직자는 물론, 모든 국민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한다면 어떠한 난국도 능히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경향신문의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10.26사건 기사 
 
입은 사람을 헤치는 도끼요  /  口是傷人斧
말은 혀를 쪼개는 칼이니  /  言是割舌刀
입은 다물어 혀를 깊이 감추어라  /  閉口深藏舌

옛 성현들의 말씀은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빛나는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해는 바뀌어 1980년이 되었다. 1980년이야말로 국내적으로 다사다난했던 해였다. 5월 17일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국 대학이 휴학에 들어갔다. 5월 31일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9월 1일엔 전두환 대통령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0월 22일엔 국민투표에 의해 새 헌법이 확정되고, 10월 27일엔 이를 공포했다. 

이처럼 국내가 멀미를 느낄 정도로 어지럽게 돌아가던 해였다. 학생들이 시위와 노사분규로 세상이 물끓듯 소용돌이치는 한해였다. 5월말께의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재무부장관 비서관으로부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재무분과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선정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솔직히 해서 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언제 생겼으며, 그 임무가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무슨 비상대책기구가 생길 것이라는 어슷비슷한 풍문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그것도 내가 그 기구의 재무분과위원으로 선발되다니,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길이 없었다. 

도대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주변의 어른들도 신중히 생각하라는 충고를 했다. 장인어른께서도 직업공무원이 급격한 정치의 회오리에 지나치게 휘말려 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따끔한 충고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울의 종침교(琮沈橋) 전설을 들려주시었다. 

조선 성종(成宗) 때의 일이다. 정비(正妃) 한씨가 승하하자 계비(繼妃) 윤씨가 들어왔다. 그러나 윤비는 덕이 없고 질투심이 강해 성종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이리하여 윤비 폐출의 묘의(廟議)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종(許琮)도 이 묘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허종은 입궐하는 도중에 잠깐 가의 누님댁엘 들렀다. 그러자 그의 누님은 아우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것이었다. 

“사가(私家)의 종이 주인의 명령이라고 주인 부인을 죽이면 후일 그 아들이 자라서 과거 제 어미를 죽인 종을 가만히 둘 리가 있겠소?”

이 의미심장한 충고를 듣자 허종은 크게 개달은 바가 있었다. 허종은 누님의 집을 나와 어느 돌다리(사직으로 가는 길)를 건너게 되었다. 허종은 그 다리 위에서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쳤다. 허종은 이를 핑계로 그 묘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뒤 세상이 바뀌어 연산군이 등극했다. 연산군은 모의 윤씨의 폐출과 사약 받은 일을 원통히 여겨 그때 묘의에 참석했던 신료들을 가려내어 모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허종만은 묘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화를 면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돌다리를 허종이 빠진 다리라 하여 그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전설은 세상을 더 오래 사신 장인이 사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해주신 충고의 말씀이라 여겨 마음속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는 이 시점에서 한갓 개인의 무사와 안일만 따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설사 장차 내게 어떠한 불행이 닥친다하더라도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나는 기꺼이 신명을 바쳐 있는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해서 일하리라.’

그렇다! 우리가 나라를 잃었던 식민지 시대엔 애국의 길은 독립운동이었는데, 이 일이 잘못될 때에는 홍모(鴻毛)도 목숨처럼 바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새벽 운동 길에 들은 <10.26사건> (55회)
  국보위 재무분과 위원으로 (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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