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목재 정비 (58회)
  제8장 정치의 회오리 속에서

합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 원목을 기계장치에서 의해 박판(薄板)으로 만들어 접착 사용하는 방법이 발명되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5년의 동명목재 설립을 효시로 1959년 해외수출이 시작되면서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1962년에는 6개 업체에 달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들어 정부의 합판수출 촉진책과 수출진흥책, 특히 수출특혜산업으로 지정육성(1965년)과 미국의 수요 급증으로 수출은 증대일로에 놓이게 되었다. 

1967년 신흥목재가 설립되고, 1969년 대명목재가 설립됨으로써 생산 능력은 계속 증가했으면, 가동률도 90%를 상회했다. 앞으로도 미국, 캐나다 등의 합판에 대한 수요증대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수출경쟁국도 늘어나고, 원목확보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한편, 당시의 국제적 추세는 주요 원목 생산국인 필리핀에서의 합판 발달로 양질의 원목을 자국에서 사용하고 있을뿐더러 각국의 원목구입 경쟁이 치열하여 원목의 공급이 제한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70년대 초에 대성목재가 원목확보난과 국내 합판 공급과잉 등으로 자체 부실화되어 정리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공급과잉과 원목확보난은 전점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합판 제조업의 대표 격인 동명목재가 많은 부채 때문에 자체로는 도저히 기사회생할 수 없는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성목재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계열회사의 부실로 주력기업의 자금을 잠식하여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었다. 더욱이 원목의 확보가 어렵고, 국내적으로는 수요의 과잉에다 앞으로의 전망마저 흐린 상태였다. 이를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비에는 부산지역에서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동명목재를 비롯한 계열기업은 부산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큰데, 이들을 정리하게 되면 부산지역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백번 들어도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저히 기사회생할 가망성도 없는 회사를, 그것도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는 회사를 무작정 은행이 지원하면서 무한정 끌고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일은행과 부산은행을 비롯한 거래은행도 동명은 사업전망도 없고 도저히 더 이상 말려들 수도 없으니 하루 빨리 정리하는 것이 은행의 부실을 막고, 그 여력을 여타 유망한 업체에 지원하는 것이 오히려 부산지역 경제를 위하는 길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관련기관회의에서 동명목재를 정리하도록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동명중공업은 대단히 중요한 산업이므로 주거래은행인 한국산업은행의 관리기업으로 전환하여 일정기간동안 은행관리를 한뒤 경영정상화가 되면 경영능력이 있는 제3자에게 인수시키도록 하고, 여타 계열기업도 정리하도록 했다. 

그 정리내역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3,000여 종업원에 대한 그동안 체불된 임금과 퇴직금을 관리은행이 우선 대불해주도록 하고, 자연 취업자를 제외한 1,000여명의 종업원에 대해서는 취업을 적극 알선토록 조치했다.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서 중소기업 채무는 관련 거래은행이 전액 지급토록 했으며, 구주주에 대해서도 그동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해서 사회환원 재산 65억 원과 부산시 지원 30억 원을 재원으로 <고화(古華)문화회관> 건립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 결국 동명목재는 청산처리 되었다 / 동아일보 (1980. 7.26.)

1980년 11월 1일자로 부산의 현지 동명문제처리위원회의 업무를 종결하고, 은행채권회수 등 잔여 업무는 관련 은행 공동관리단에 인계 완료했다. 끝으로 동면목재 부지 60만 평에 대해서는 그 처리 방안에 여러 의견이 속출했으나 나는 현지를 방문하여 부산시민의 여론을 파악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부산부두시설이 물동량보다 부족한 상태인데, 앞으로 이들 부두시설은 확장할 마땅한 부지가 없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동명목재 부지는 60만평에 달해 넓은데다가 위치도 부두시설 부지로서는 천혜의 적지라는 것이었다. 

그런 여론에 따라 나는 직접 현지를 둘러보았다. 가보니 비전문가인 내 눈에도 지형적인 모든 상황이 부산부도 확장 대상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귀경 즉시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보고하여 결심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60만 평에 대한 평가액을 500억 원으로 하고, 국가예산에 반영해 매년 100억 원씩 5년 동안 분할상환토록 하는 한편, 미상환분에 대해서는 은행금리에 대한 이자도 지급하도록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 등도 국가예산에 의해 확실한 채권이 보장되는데다가 정상적인 금리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대단힌 환영했다. 그러나 그 집행과정에서 영문을 모르지만 몇 차례 걸쳐 이 안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땅을 국가가 막대한 돈을 들여 살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땅을 탐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짐작을 하면서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뭐라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뒤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있을 때인데,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그것을 당초 내가 관여했던 문제이므로 내게 다시 검토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몇 번이나 논의해서 결정한 국가방침인데, 또 다시 이런 작태가 벌어지다니!’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관련기관 20여명이 참석한 회의를 소집하여 주재했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내 판단 기준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리에서 흥분해 호통을 좀 치게 되었다. 당초대로 국가가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매수하고, 그 부지는 부산의 제3부도 시설 건설용으로 쓰도록 하는 방침을 세 번째 확정하고, 그 합의결과를 상부에 보고했다. 

내가 듣기로는 이 제3부두를 통합해도 부산의 부두시설은 절대 부족이어서 앞으로도 어떻게 확장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고민거리라 했다. 그 뒤 이 사실을 아는 항만청장이 이야기로는, 그때 만약 그것을 국가가 매입하지 못하고 민간에 넘어갔더라면 큰 일 날 뻔했다는 것이었다. 가격도 그때에 비해 수십 배 올랐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아픈 부분을 지금 다시 이렇게 되뇌는 것은, 내가 한 일을 자랑하고자 하는 알량한 심정에서 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부산에 가는 일이 있을 때는 그쪽을 바라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 혼자 긍지와 보람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여기에 이렇게 기록해 두는 것은 오로지 후인들을 위해 참고자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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